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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시인 / 아무래도 나는
이곳의 철없는 시인들이 자네를 만나서 북어를 안주삼아 가난한 소주라도 한잔 크―한다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자네의 출현은 재앙일세 어느 날 갑자기 자네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쩌면 좋겠나 만약에 자네와 크―한다면 상기 피고인은 북괴가 반국가 단체이고 반국가 단체의 지령을 받는 자와 회합하는 것은 반국가 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넉넉히 알고 있는 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국가 단체의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하여…… 소주(진로 2홉들이) 3병을 나발불었을 뿐 아니라 북어갈비를 씹는 무엄한 죄를 범하게 된다네 그러니 친구여 자네가 나타나지 않기를 오직 바랄 뿐이네 아니, 실은 어느 날 갑자기 자네가 나타날 가능성이 절대 없다는 걸 전제로 나는 자네를 마구 그리워하는 시를 대량 제작하여 민족시인이 되려고 음모를 꾸몄다네 여보게 어쩌면 우리의 시는 증오의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난 한 무더기 독초일 뿐인지도 모르겠네 무성한 증오와 무성한 감격만이 길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이 시대에.
우리시대의 예수, 실천문학사, 1987
김진경 시인 /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들고 오는 답안지의 ○×표 속에서 너희들이 한사코 따지는 1, 2점 속에서 나는 죽는다. 나는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진다.
아이들아, 미안하구나 이것은 나의 습관이다. 넘을 수 없는 비무장지대에서의 삼 년 견디는 법은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지는 것 여기 있는 것은 이미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는 것
제대를 한 뒤에도 넘을 수 없는 선을 만날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마음 편해지고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고, 철조망을 보았다.
넘을 수 없는 절망의 선을 무수히 어디에서나 아, 너의 시험지 위에도 여기에도 여기에도 우리의 살을 파고드는 날선 가시 너와 나 사이에도, 또 너와 나 사이에도
아이야, 미안하구나 너를 때린 것은 너를 때린 게 아니라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언제나 넘을 수 없는 철망 앞에서 날선 가시를 두려워하는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답안지의 ○×표보다도 악착 같은 1, 2점보다도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아무도 가슴에 철망을 박고 녹여 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이땅의 만남을 모르는 것이다.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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