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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진경 시인 / 아무래도 나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8.

김진경 시인 / 아무래도 나는

 

 

이곳의 철없는 시인들이

자네를 만나서

북어를 안주삼아

가난한 소주라도 한잔

크―한다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자네의 출현은

재앙일세

어느 날 갑자기

자네가 나타난다면

나는 어쩌면 좋겠나

만약에 자네와 크―한다면

상기 피고인은 북괴가 반국가 단체이고 반국가 단체의 지령을 받는 자와 회합하는 것은 반국가 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넉넉히 알고 있는 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국가 단체의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하여……

소주(진로 2홉들이) 3병을

나발불었을 뿐 아니라

북어갈비를 씹는

무엄한 죄를 범하게 된다네

그러니 친구여

자네가 나타나지 않기를

오직 바랄 뿐이네

아니, 실은

어느 날 갑자기 자네가 나타날

가능성이 절대 없다는 걸 전제로

나는 자네를

마구 그리워하는 시를

대량 제작하여

민족시인이 되려고

음모를 꾸몄다네

여보게 어쩌면

우리의 시는

증오의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난 한 무더기 독초일

뿐인지도 모르겠네

무성한 증오와

무성한 감격만이

길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이 시대에.

 

우리시대의 예수, 실천문학사, 1987

 

 


 

 

김진경 시인 /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들고 오는 답안지의 ○×표 속에서

너희들이 한사코 따지는 1, 2점 속에서

나는 죽는다.

나는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진다.

 

아이들아, 미안하구나 이것은 나의 습관이다.

넘을 수 없는 비무장지대에서의 삼 년

견디는 법은 죽었다고 간주하고 마음 편해지는 것

여기 있는 것은 이미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는 것

 

제대를 한 뒤에도

넘을 수 없는 선을 만날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마음 편해지고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마음 편해지고, 철조망을 보았다.

 

넘을 수 없는 절망의 선을 무수히

어디에서나

아, 너의 시험지 위에도

여기에도 여기에도 우리의 살을 파고드는 날선 가시

너와 나 사이에도, 또 너와 나 사이에도

 

아이야, 미안하구나

너를 때린 것은 너를 때린 게 아니라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언제나 넘을 수 없는 철망 앞에서

날선 가시를 두려워하는

나의 비겁을 때린 것이다.

 

답안지의 ○×표보다도 악착 같은 1, 2점보다도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아무도 가슴에 철망을 박고 녹여 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이땅의 만남을 모르는 것이다.

 

광화문을 지나며, 풀빛, 1986

 

 


 

김진경(金津經.1953.4.9∼ ) 시인

충남 당진 출생.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 시 당선. 우신고교, 양정고교 교사. 양정고교 재직 중이던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2개월간 수감생활을 했으며, 이후 교육운동에 투신했다. [오월시] 동인.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 참교육실천위원장, 통일시대교육영눅소 소장, 계간 [교과연구] 발행인, 문학계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발행인,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비서관, 대통령 자문정책기획위원 등 역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통일시대교육연구소 소장 역임. 2000년 12월 시집 <슬픔의 힘>으로 제5회 시와시문학 작품상 수상. 2006년『고양이 학교』로 프랑스 제 17회 앵코뤼브티블 수상. 2007 한국문학 시부문 신인상.

청소년 문학 <굿바이 미스터 하필> <우리들의 아름다운 나라>시집 <광화문 지나며>(풀빛.1986) <지구의 시간> <갈문리 아이들(청사.1984)> <우리 시대의 예수(실천문학사.1987)> <별빛 속에서 잠자다>(청비.1996) <슬픔의 힘(문학동네.2004)> 소설<이리>(실천문학사.1998) 동화집 <은행나무 이야기>(문학동네.1998) <한울이 도깨비 이야기>(우리교육,2000)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은 까치>(문학동네.2000)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