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창완 시인 / 수유리의 침묵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8.

김창완 시인 / 수유리의 침묵

 

 

꽃샘바람 불리라 미리 알았다 해도 피고야 말

진달래 무더기로 져 길 위에 나뒹군다.

짓밟혀도 아프단 말 못 하는 꽃잎 짓밟고

손등으로 눈 비비며 황사(黃砂) 속 더듬어 수유리 찾아가니

꽃샘바람은 좁은 내 어깨 다시 움츠리게 하고

말라붙은 입술도 트게 한다 그러니 침묵해야지.

저물녘 두꺼워지는 산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나에게

내 키보다 훨씬 큰 그림자 앞세우고 돌아나오는 나에게

그러니 침묵해야지 아직은 침묵해야지 일러 주는 이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이냐는 물음에조차 입 다문다.

돌에 새긴 그대들의 주먹만큼 내 주먹은 단단하지 못하고

돌에 새긴 그대들의 가슴만큼 내 가슴은 뜨겁지 못해

쓰다듬어 보아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내 손바닥엔

감옥에서 보내 온 아우의 편지가 구겨져 있을 뿐

형님, 형님이란 말이 돌멩이처럼 날아와 나를 때린다.

작은 돌멩이들아 너희가 왜

날아가 새 되지 못하고 떨어져 뒹굴며

이 외면당한 변두릿길에서 짓밟히고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침묵해야지

돌멩이들조차 그렇게 일러 주는 수유리

짙어지는 어두움.

 

인동일기, 창작과비평사, 1978

 

 


 

 

김창완 시인 / 신기료 할아버지

 

 

걸어가시라 신발 해진 이 기워 신고

넘어야 할 고개 몇 개라도 넘으시라

아직은 아무도 이르지 못한 땅끝으로

거기 당신네들 발길이 헤맬지라도

땅끝까지 안심하고 걸어가시라

무딘 송곳, 밀 먹인 실, 허리 굽은 귀 큰 바늘

키 작은 구두못 여기 모두 모였으니

당신네들 안심하고 걸어가시라

떠돌며 십 년 주저앉아 십 년

굽은 등에 햇살받고 다시 몇 년 기약 없이

다리 부러진 돋보기로 지내 온 길 돌아보니

돌자갈 가시밭길 험하기도 하여라

이 세상 모든 신발이여 앞길 또한 그러하나

새 신보다 헌 신이 발 편한 줄 아시라

닳은 뒷굽 갈아 대고 터진 앞창 기워 신고

당신네들 갈 길로 걸어가시라

걸어가시라 개오릿들 건너 샛말 지나

두고 온 우리 동네 고샅길 꺾어 돌아

왼쪽으로 세 번째 집 머무를 곳 거기

못 가는 사정 아는 이 없어도 서운치 않으니

사과 궤짝 위 낡은 구두 몇 켤레여

먼지와 해으름과 눈꼽과 잔기침과

그런 것 아랑곳말고 걸어가시라

 

우리 오늘 살았다 말하자, 실천문학사, 1983

 

 


 

 

김창완 시인 / 쑥

 

 

자네가 허겁지겁 세상에 뛰어온 건

구황(救荒)을 위해서고

 

자네가 아득바득 세상을 사는 건

폐허가 불쌍해서 그러는 거다.

 

이장네 씨암탉 허벅지를 뜯어먹고

기름진 뼈끝마다 고름 든 면장님의

등창에 뜸질을 위해서

자네는 한 줌의 재로도 스러진다.

 

자작농이 되었다는 자랑 때문에

쇠스랑에 찍혀 죽은 우리 외삼촌

피보다 먼저 흘린 허연 골을 머리에 이고

보따리장수 외숙모의 발자국마다

괴어 있는 정액들은 눈감고 웃는다.

면사무소 뒤뜰에는 만발한 아카시아.

 

바보 같은 그를 위해 자네는 불린다.

 

쑥이라고

자네더러 쑥이라고 세상이 그런다.

농부의 무덤에는

쑥이라고 불리는 풀이파리만 무성하다.

 

시퍼런 핏물로 돌절구를 물들이고

이빨에 시퍼런 풀물이 들도록

씹어도 씹어도 향기롭기만 한 쑥이여.

 

인동일기, 창작과비평사, 1978

 

 


 

 

김창완 시인 (1942. 7. 19. ~ )

호는 금오(金烏). 전남 신안군 출생. 광주 조선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서울신문] 신춘 문예에 <개화>가 당선되고, 같은 해 [풀과 별]에 <꽃게> 등의 시가 추천되면서 등단함. "반시" 동인. 1980년 [소설문학] 편집장, 1982년 [여원] 편집장, 1989년 [조선일보] 가정조선부장, 1994년 동 기획출판부장 등 역임. 시적 경향은 척박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의 조용하지만 값진 의미를 친숙하고 서정적인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작품에는 <겨울바다> <인동일기> <소금장수의 재주> < 비평사, 1978)』『우리 오늘 살았다 말하자(실천문학사, 1984) 』 《나는 너에게 별하나 주고 싶다》(자유문고,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