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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 / 길
실낱같이 가는 샛길로 샛길로 가서 마지막 샛길 끝에 말이라도 걸면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슬픈 초가 한 채
아무도 가지 않고 이따금 내가 가다가 해 져서 길 잃고 길 없이 돌아온다
누이야 날이 저문다, 창작과비평사, 1988
김용택 시인 / 꽃
그대 잠 못 들고 뒤척일 때 꽃 지는 소리 들린다 다시 돌아눕는 그쪽이 두렵다 무서워 다시 찾는 쪽도 꽃 지는 소리 무섭다 어둡다 어둠 속에서도 눈 감으면 어디선가 아픈 숨소리 들린다 그러면 또 다시 내가 돌아누우며 네 손을 더듬어 찾는 줄 알라 우리들의 잠마저 이리 아프고 어디로 돌아눕든 각 진 돌멩이 맨살에 박힌다 친구여 어디로 돌아누울 곳 없어 이렇게 발끈 쭈그려앉은 이 무서움 속에서 어디선가 우리를 부르는 새벽닭 울음소리를 듣자 어둠 속에 뜬 눈이 꽃처럼 아프다
첫봄이 먼데서 겨울을 이기며 온다.
꽃산 가는 길, 창작과비평사, 1988
김용택 시인 / 꽃산 찾아가는 길
오늘도 나는 당신 속에 저뭅니다. 당신을 찾아나선 이 화창한 긴긴 봄날 긴긴 해 다 질 때까지 당신을 찾아갑니다. 당신을 찾아가는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물 막히면 물 건너고 산 막히면 산 넘듯, 당신 늘 꽃 펴 있다는 그리움 하나로 이겨갑니다. 가다가 가다가 해 저물면 산 하나 되어 산속에 깃들었다가 해 떠오면 힘 내어 갑니다. 당신 만나 환히 꽃 필 저기 저 남산은 꽃 없는 쓸쓸한 산 아니라 해맑은 해 어디나 돋는 나라, 눈 주면 늘 거기 꽃 피는 당신 찾아 오늘도 지친 이 몸 당신 찾아가다가 저녁 연기 오르는 마을 저문 산속에 산 되어 깃듭니다.
꽃산 가는 길, 창작과비평사, 1988
김용택 시인 / 너무나 그리들 말더라고
너무그리 말더라고 너무그리 말더라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물길어서 밥을짓고 밥넘겨서 재져놓고 고추갈아 김치담고 아침먹고 설겆이 설겆이를 한둥만둥 고추널고 닭내놓고 콩깨수수 널어놓고 일을가며 염소매고 헌빨래를 빨아널고 고추따다 깨를털고 팥거두고 콩거두고 밤따다가 감을따고 피를뽑다 명거두고 호박따다 벼를베고 허리펼수 없는데다 너무그리 말더라고 너무그리 말더라고 들판에서 돌아올때 이고지고 들고메고 한몸에다 두세지게 치맛자락 불붙는데 밥차려서 점심먹고 윗목에다 밀쳐놓고 고추뒤적 참깨뒤적 콩팥수수 투덕투덕 참깨들깨 탈탈털어 여기저기 널어놓고 후여후여 새를쫓고 돼지밥에 소밥주고 워이워이 닭을쫓고 눈코뜰새 없는데다 너무그리 말더라고 해저물어 돌아올때 염소새끼 몰고와서 고추담고 빨래걷고 참깨수수 콩팥담고 여물쑤고 밥을허고 허리펼수 없는데다 이장반장 면서기들 감사온다 야단이며 면장온다 청소하라 군수온다 청소하라 저녁먹고 설겆이 썩은고추 가려내어 배죽죽죽 타서널고 호박조각 감잣대를 다듬어서 추려놓고 품앗이로 감을깎네 말도마라 말도마라 일할수록 태산인데 혀도혀도 너무허네 입때저때 요때저때 그택이택 도로이택 뼛골들이 빠지는데 복지농촌 기계영농 입만열면 그소리 한나라에 살면서 너무그리 말더라고 어떤놈은 그렇고 어떤놈은 이런다요 테레비에 편히앉아 가을피부 영양크림 손톱청소 발톱청소 입맛밥맛 영양식에 미용체조 살빼기에 디스코가 뭣이다요 콘도골프 해외여행 미제일제 프랑스제 이쁜여자 옷벗겨서 이화장품 저화장품 가을정취 농촌풍경 말이좋다 말이좋아 너그덜만 입이있고 너그덜만 사람이냐 테레비에 편히앉아 씨알머리 없는소리 너무그리 말더라고 부엉새가 우는구나 부엉새가 우는구나 서울에간 내딸들아 화장품을 만든딸아 일손들이 모자란다 사우디간 내아들아 사람없다 부엉부엉 일만하고 놀인없다 곡식금은 똥금부엉 돼짓금도 부엉똥금 사람없음 서울가고 놀이없음 여의도가 일손없음 기계사고 억울하면 이사가고 못살며는 잘살아라 알겠느냐 부엉부엉 새벽녘이 올때까지 부엉새가 우는구나 아이고대고 아이고대고 부엉새가 우는구나 너무나 그리들 말아라 부엉새가 우는구나.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5
김용택 시인 / 너의 자리
어떻게 놓아도 자리잡지 못한다 내 잠은 어디에 놓지 못한 잠을 머리에 희게 이고 달진 새벽밤까지 마른 발바닥으로 걸어 꽃인 그대에게로 가서 불덩이 같은 내 이마를 기댄다 숨결 고른 새벽 하늘 뜨겁다 그대의 머리도 내 몸은 어제보다 몇 근 더 줄어든다
밤마다 나는 어디에 홀려 떠돈다 마지막엔 그대를 만나 뜨거움을 줄이고 그대는 내 뜨거움을 빼앗고 무심히 나를 버린다
그대는 어제보다 가벼워진 것 같다 너는 날 것 같다 날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너는 다음날 새벽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 수많은 꽃 중에서 너의 자리는 빌 것 같다
누이야 날이 저문다, 창작과비평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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