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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상 시인 / 무소부재(無所不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7.

구상 시인 / 무소부재(無所不在)

 

 

아지랑이 낀 연당(蓮塘)에

꿈나무 살포시 내려앉듯

그 고요로 계십니까.

 

비 나리는 무주공산(無主空山)

어둑이 진 유수(幽邃) 속에

심오하게 계십니까.

 

산사(山寺) 뜰 파초(芭蕉) 그늘에

한 포기 채송화 모양

애린(愛隣)스레 계십니까.

 

휘영청 걸린 달 아래

장독대가 지은 그림자이듯

쓸쓸하게 계십니까.

 

청산(靑山)이 연장하여

병풍처럼 둘렀는데

높이 솟은 설봉(雪峰)인 듯

어느 절정에 계십니까.

 

일월(日月)을 조응(照應)하여

세월 없이 흐르는 장강(長江)이듯

유연(悠然)하게 계십니까.

 

상강(霜降) 아침

나목(裸木) 가지에 펼쳐 있는

청렬(淸冽) 안에 계십니까.

 

석양이 비낀

황금 들판에 넘실거리는

풍요 속에 계십니까.

 

삼동(三冬)에 뒤져놓은

번열(煩熱) 식은 대지같이

태초의 침묵을 안고 계십니까.

 

허허창창(虛虛蒼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무애(無涯)도 넘어

아득히 계십니까.

 

칠색(七色)의 무지개 위에

성좌(星座)를 보석자리 삼아

동천(東天)의 일출(日出)마냥

휘황스레 계십니까.

 

이화(李花), 도화(桃花) 방창(芳暢)한데

지저귀는 저 새들과

옥류(玉流)에서 노니는 고기떼들의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계십니까.

 

풀잎 뜯어 새김하며

먼산 한번 구름 한번 바라보는

산양(山羊)의 무심으로 계십니까.

 

저고리 섶을 연 젖무덤에 안겨서

어미를 쳐다보는 아기의 눈빛 같은

무염(無染) 속에 계십니까.

 

저 신선도(神仙圖)

흰 수염 드리운 그윽한 미소로

굽어살피고 계십니까.

 

이렇듯 형상으론 섬기지 못하고

붓 안 닿는 여백같이

시공(時空)을 채워 계심이여!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천주(天主)님!

 

구상문학선, 1975

 

 


 

 

구상 시인 / 봄맞이 춤

 

 

옛 등걸 매화가

흰 고깔을 쓰고

학(鶴)춤을 추고 있다.

 

밋밋한 소나무도

양팔에 푸른 파라솔을 들고

월츠를 춘다.

 

수양버들 가지는 자잔가락

앙상한 아카시아도

빈 어깨를 절쑥대고

대숲은 팔굽과 다리를 서로 스치며

스탭을 밟는다.

 

길 언저리 소복한 양지마다

잡초 어린것들도 벌써 나와

하늘거리고

 

땅 밑 창구멍으로 내다만 보던

씨랑 뿌리랑 벌레랑 개구리도

봄의 단장을 하느라고

무대(舞臺) 뒤 분장실(扮裝室) 같다.

 

바람 속의 봄도

이제는 맨살로 살랑댄다.

 

구상문학선, 1975

 

 


 

 

구상 시인 / 수난(受難)의 장(章)

 

 

우 몰려온다. 돌팔매가 날은다.

머슴애들은 수수깡에 쇠똥을 꿰매 달고

어른들은 곡괭이를 휘저으며 마구 쫓아오는데

돌아서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선지피 쏟아지는 이마를 감싸쥐고서

어머니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이제 어디로 달려야 하는가.

 

쫓기다가 쫓기다가 숨었다.

상여집으로 숨었다.

애비 욕, 에미 망신 고래고래 터뜨리며

벌떼처럼 에워싸고 빙빙 돌아가는데

나는 얼른 상여 뚜껑을 열어제치고

벌떡 드러누워 숨을 꼭 죽였다.

 

피를 토한 듯 후련해지는 가슴이여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지는 마음이여

사람도 도깨비도 얼씬 못하는 상여 속에서

나는 어느새 달디단 꿈 한 자리를 엮고 있었다.

 

상여 속에 송장처럼 잠들은

사나이 얼굴은 십상 달같이 흴 게다.

어쩌면 상달같이 깜찍한 여인이 별 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상처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있을 풍경

나의 달가운 꿈속의 꿈이여.

 

추억의 연못가엔 사랑의 연꽃도 한 송이 피었으리.

다홍신은 벗어놓고 외로움에

장승처럼 못박혀 있는

또 나의 사랑.

 

꽃수레처럼 화려한 상여를 타고

림보*로 향하는 길 위엔

곡성마저 즐겁구나

소복한 나의 여인아

사흘만 참으라.

 

* 림보: 예수가 죽어서 부활하기 전 가 있었다는 선령(善靈)이 머물던 곳. 일명 고성소(古聖所).

 

구상시집, 청구출판사, 1951

 

 


 

구상(具常 1919년-2004년) 시인. 언론인

본명 구상준(具常浚). 호(號)는 운성(暈城). 1919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출생.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길〉·〈여명도 黎明圖〉·〈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백민〉에〈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유언〉(1948)·〈사랑을 지키리〉(1949) 등을 발표했으며, 〈영남일보〉·〈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시집〉을 펴냈고,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한 시집 〈초토의 시〉를 펴내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