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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덕수 시인 / 실바람같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7.

문덕수 시인 / 실바람같이

 

 

매달릴

당신의 빈가지를 찾아

 

헤매는

허공 속,

 

오직 당신에게만 울릴

내 영혼의

 

그 먼

흐느낌……

 

황홀, 세계문화사, 1956

 

 


 

 

문덕수 시인 / 원(圓)에 관한 소묘(素描)

 

 

한 개의 원(圓)이

굴러간다.

천사의 버린 지환(指環)이다.

그 안팎으로 감기는 별빛과

꽃잎들……

금빛의 수밀도(水蜜桃)만한

세 개의 원(圓)이

천 개의 원(圓)이

굴러간다.

신(神)의 눈알들이다.

어떤 눈알은 모가 서서

삼각형이 되어

쓰러진다.

어떤 눈알은 가로 누운

불기둥이 되어

뻗는다.

한 개의 원(圓)이

팔월 한가위의 달만큼

자라서

굴러간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원(圓)에 대하여

 

 

네 품안에 한 알의 씨로 묻혀

너를 닮은 과일로 익고 싶다.

내 물살의 칼날은 꽃잎이 되고

뾰족한 내 돌부리는 만월(滿月)처럼 깎이어

너를 닮아 차라리 타 버리고 싶다.

외길로만 뻗는 이 직선을 휘어잡아다오.

부러져 모가 서는 이 삼각(三角)을 풀어다오.

꺾이어 모가 서는 이 사각(四角)에서 놓아다오.

윤곽이 아니라 그대로 가득 찬 충실이기에

실은 우주도 너를 닮은 충실이기에

네 품안에 떨어진 하나의 물방울로

바다처럼 넘치며 출렁이고 싶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인연설

 

 

어느 연둣빛 초봄의 오후

나는 꽃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랬더니 꽃잎 하나가 내려 와서는

내 왼 몸을 안아보고서는 가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입술이며 이마를 한없이 부비고 문지르고,

또 한 잎이 내려와서는

손톱 끝의 먼지를 닦아내고,

그리하여 어느덧 한세상을 저물어

그 꽃나무는 시들어 죽고,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꽃이 가신 길을 찾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었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文德守) 시인

1928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 호는 심산(心山), 청태(靑笞)이다. 홍익대학교 국문과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침묵>, <화석>, <바람 속에서>가 추천되어 등단. 1964 현대문학상•1978 현대시인상•1981년 아카데미 학술상•1985 펜문학상 수상. 시집: {황홀}(1956), {선(線)·공간(空間)}(1966), {새벽바다}(1975), {영원한 꽃밭}(1976),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1980), {다리놓기}(1982), {문덕수시선}(1983), {조금씩 줄이면서}(1985), {그대, 말씀의 안개}(1986) 등. 현재 홍익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