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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 시인 / 보리밭에서
아직은 안된다. 좀더 키를 낮추어, 없는 듯이 밑바닥에 온몸을 깔아야 한다. 저토록 삼엄한 서릿발의 살기가, 백척간두 너를 노린다. 참으로 큰 뜻의 주인이 와서 너의 뿌리를 튼튼히 흙 속에 다져줄 때까지 쉿! 죽은 듯이 키를 낮추어야 한다.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 시인 / 사랑
내 더러운 피가 그대 흰옷을 물들일 때까지. 물들어 더러운 그대가 그대 깨끗한 내장(內臟)을 찢을 때까지.
더러움은 더럽기 때문에 우리의 참혹한 살갗을 빛나게 하고 어둠은 어둡기 때문에 우리를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송기원 시인 / 살붙이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 여덟 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 오매, 이십 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땜시 그런달 거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아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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