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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기원 시인 / 보리밭에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7.

송기원 시인 / 보리밭에서

 

 

아직은 안된다.

좀더 키를 낮추어, 없는 듯이

밑바닥에 온몸을 깔아야 한다.

저토록 삼엄한 서릿발의 살기가, 백척간두

너를 노린다.

참으로 큰 뜻의 주인이 와서

너의 뿌리를 튼튼히 흙 속에 다져줄 때까지

쉿! 죽은 듯이 키를 낮추어야 한다.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 시인 / 사랑

 

 

내 더러운 피가 그대 흰옷을 물들일 때까지.

물들어 더러운 그대가 그대 깨끗한 내장(內臟)을 찢을 때까지.

 

더러움은 더럽기 때문에 우리의 참혹한 살갗을 빛나게 하고

어둠은 어둡기 때문에 우리를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송기원 시인 / 살붙이

 

 

나이가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 여덟 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몰르고 들어와

오매, 이십 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땜시 그런달 거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아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라우.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宋基元) 시인, 소설가

1947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 서라벌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회복기의 노래〉와 같은 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경외성서(經外聖書)>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소설집 『월행(月行)』(1979), 『다시 월문리에서』(1984), 『인도로 간 예수』(1995)와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1994), 『여자에 관한 명상』(1996), 『청산』(1997), 『안으로의 여행』(1999), 『또 하나의 나』(2000)와 시집으로 『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1983), 『마음속 붉은 꽃잎』(1990) 등이 있음. 1983 제2회 신동엽 문학상. 1993 제24회 동인문학상. 2001 제9회 오영수문학상. 2003 제6회 김동리문학상. 2003 제11회 대산문학상.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