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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달자 시인 / 오래 말하는 사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1. 7.

신달자 시인 / 오래 말하는 사이

 

 

너와 나의 깊은 왕래를 말로 해왔다

오래 말 주고받았지만

아직 목이 마르고

오늘도 우리의 말은 지붕을 지나 바다를 지나

바람 속을 오가며 진행 중이다

종일 말 주고 준 만큼 더 말을 받는다

말과 말이 섞여 비가 되고 바람이 되고

때때로 계절 없이 눈 내리기도 한다

말로 살림을 차린 우리

말로 고층 집을 지은 우리

말로 예닐곱 아이를 낳은 우리

그럼에도 우리 사이 왠지 너무 가볍고 헐렁하다

가슴에선 가끔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말할수록 간절한 것들

뭉쳐 돌이 되어 서로 부딪친다

돌밭 넓다

살은 달아나고 뼈는 우두둑 일어서는

우리들의 고단한 대화

허방을 꽉 메우는 진정한 말의

비밀 번호를 우리는 서로 모른다

진정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은폐의 늪 그 위에

침묵의 연꽃 개화를 볼 수 있을까

단 한 마디만 피게 할 수 있을까

단 한마디의 독을 마시고

나란히 누울 수 있을까

 

 


 

 

신달자 시인 / 커피를 마시며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번째

커피 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커녕

몇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사약(死藥)처럼

커피를 마신다.

 

 


 

 

신달자 시인 / 허수아비 1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 마라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빈들판

낡고 해진 추억만으로 한세월 견뎌왔느니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누구를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마라

일체의 위로도 건네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허수아비는

혼자라서 외로운게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외롭다.

사랑하는 그만큼 외롭다

 

 


 

 

신달자 시인 / 헌화가

 

 

사랑하느냐고

한마디 던져 놓고

천길 벼랑을 기어오른다

오르면 오를수록

높아지는

아스라한 절벽 그 끝에

너의 응답이 숨어 핀다는

꽃, 그 황홀을 찾아

목숨을 주어야

손이 닿는다는

그 도도한 성역

나 오로지 번뜩이는

소멸의 집중으로

다가가려 하네

육신을 풀어 풀어

한 올 회오리로 솟아올라

하늘도 아찔하여 눈감아버리는

캄캄한 순간

나 시퍼렇게 살아나는

눈맞춤으로

그 꽃을 꺾는다

 

 


 

 

신달자 시인 / 화장

 

 

속이 비었나봐

화장이 진해지는 오늘이다.

 

결국은 지워 버릴 속기(俗氣)이지만

마음이 비어서 흔들리는

가장 낮은 곳에 누운 바람이

 

붉은 연지로

꽃이 핀다

아이섀도의 파아란

물새로 날아 오른다

 

안으로 안으로 삭이고만 살던

여자의 분냄새

여자의 살냄새

대문 밖을 철철 흘러나가

삽시간 온 마을 소문의 홍수로

잠길지라도

 

진해버려

진해버려

쥐 잡아 먹은 듯

그 입술에 불을 놓아 버려

 

결국은

색과 향이 있는

대담한 사생활은

그저 이것 하나뿐.

 

 


 

 

신달자 시인 / 희망

 

 

초등학교 때 내 희망은

교회첨탑의 높이

새로 난 시멘트 다리의 폭이었다.

 

그렇게 높게 그렇게 넓게…

 

서울 바람을 먹고

대학 시절 방학에 내려가 본

내 희망은

주머니에 넣어도 모자랄

그 높이 그 넓이였다.

 

지금은

다시 그 교회첨탑은 높기만 하고

다리의 폭은 넓기만 한데

거품 같은 세월은 나쁘지만 않아

탐(貪)을 버리고 진(眞)을 찾는데

손가락쯤 닳아도 아프지 않은…

 

 


 

신달자(愼達子, 1943~ ) 시인

경남 거창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2년 《현대문학》을 통해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봉헌문자』, 『겨울축제』, 『모순의 방』, 『시간과의 동행』, 『아버지의 빛』, 『아가』, 『아버지의 빛』 등과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외에 산문집 『백치애인』,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 』등이 있음. 1964년 여상 신인여류문학상, 1989년 대한민국문학상, 1998년 '향문화대상, 2001년 시와 시학상, 2004년 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