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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선희 시인 / 폴라 익스프레스

by 파스칼바이런 2020. 12. 28.

장선희 시인 / 폴라 익스프레스

 

 

   기차를 움직이는 건 방울소리

 

   기관사는 토르라 불리는 긴머리 남자

   천둥이 치면 북극까지 고래 떼 위를 지나간다

   회색협곡은 익스프레스를 달리게 하는 추진기

   반나절을 달려 도착한 페니키아인의 범선

   꿈의 편대가 지나간 흔적 같은 미노아에 멈춰 있다

 

   달려라 폴라 달려라 레일

 

   헛바퀴 굴리던 파도의 후예들이 손짓한다

   노르웨이 숲, 전나무로 도열해 있는 북구의 전설, 상기된 얼굴들이 북극별처럼 빛난다

   물푸레남자 느릅나무여자가 산다는 북위 53도,

 

   비프뢰스트에 멈추면 무지개다리가 되는 기차

   파수꾼 하임달이 바이킹 모자를 쓰고 긴 고동을 분다

   오직 신과 거인만이 지날 수 있다는 그곳,

 

   기차를 멈추면 울리는 방울소리

   이이르의 속눈썹 같은 노란 달

   중간계의 땅속 난쟁이들도 바나하임의 무지개다리에 모여든다  

 

   금덩이를 좋아하는 난쟁이들, 겁은 많아도 모험을 찾아 떠나는 건

   전설의 힘을 믿기 때문

   대장간 불씨 잠시 꺼놓고 일 년에 한 번

   폴라 익스프레스에 오르는 날,

 

   은빛 망토를 펼쳐놓은 하얀 신들의 땅, 거긴 난쟁이 울프족의 영역,

   신들의 은빛 머리카락에 기대어 잠이 들면

   푸른 살갗의 다비드족이 방울소리에 오른다

   손가락 대신 긴 꼬리로 오감을 느끼는 특이한 부족

 

   대장바위 엘 캐피탄을 피해가는 방법을 안다고,

   그들 어깨엔 마리포사가 정령처럼 앉아있다

 

   은하수를 깔아놓은 긴 술의 스커트를 끌고가는 북구여인들,

   두꺼운 저녁 속으로 느릅나무 가지가 걸어간다

 

   “백야의 하늘 누가 입었던 외투일까요?”

 

   붉은머리의 기관사 토르

   그의 손에서만 움직이는 번개망치

   탈선기록이 없는, 산들이 떠있는 허공

   거꾸로 자라는 나무들의 이정표를 지나

 

   달려라 폴라 달려라 레일

 

   눈폭풍 스무하루를 달려 도착한 여정의 끝,

   그 미로의 플랫폼에 신과 인간의 경계가 풀릴 때,

   밝은 별이 인도하는 나무종족도 함께 닻을 내린다

 

   눈의 지층에서 태어난 고무판화 같은 하늘 지나 아스가르드의 신전이 보이는 곳

   북쪽 끄트머리

 

   끼이익, 천둥소리

   생을 마치기 좋은 니플하임*의 초입

 

*북구신화에 나오는 지명으로 최초로 거인과 신들이 창조된 곳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1월호 발표

 

 


 

장선희 시인

1964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2년 제1회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