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천 시인 / 가난한 자의 노래
가난도 잘만 길들이면 지낼만 하다네 매일 아침 눈길 주고 마음 주어 문지르고 닦으면 반질반질 윤까지 난다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는 되지 못해도 그런대로 바라보고 지낼만 하다네
더욱이 고마울 데 없는 것은 가난으로 돗자리를 만들어 깔고 누우면 하늘이 더 푸르게 보인다네 나무의 숨소리도 더 잘 들리고 산의 울음소리도 더 맑게 들린다네
더욱이 고마운 것은 가난으로 옷을 기워 입으면 내 가까이 사람들이 살고 있고 내가 그들 속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네
윤수천 시인 / 감히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사는 일은 무서움이다. 사랑도 다를게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사랑을 흉내낼 뿐 모든 것을 다 주지 않는다. 그런 후에 다들 모여서 사랑했었다고 말한다. 후회스러운 부끄러움이여! 사랑이 진실하지 않으면, 삶도 진실일 수 없다. 목숨을 걸어본 경험없이는, 감히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윤수천 시인 / 구두 뒷굽을 갈며
비스듬히 닳은 구두 뒷굽을 갈면서 내 인생도 저렇게 비스듬히 닳은 것을 깨닫는다 허, 이럴수가!
내 딴에는 똑바로 걸어갔다고 생각했느데 그게 아니다 뒤뚱거리지 않았으면 생기지도 않았을 저 흠집
등 뒤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었겠지 저 사람 좀 보게나, 저 사람 좀 보게나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겠지
비스듬히 닳은 구두 뒷굽을 갈면서 내 인생도 저렇게 비스듬히 닳은 것을 깨닫는다 허, 이럴수가! 이럴수가!
윤수천 시인 /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로 부서진다 해도 아깝지 않을 거야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부서져서 하얀 포말로 그대의 발치에 머무른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랑 아낌없이 주고 남은 재처럼 거룩한 사랑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완전하고 비로소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
그대 안에 나를 던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한 그루 나무로 그대 안에서 고이 숨을 쉴 수 있기에
윤수천 시인 / 기둥과 언덕
만원 전철 안에서는 혼자의 힘만으로는 서 있을 수 없다 내 옆사람 또 옆사람들이 기둥이 되어 줄 때 나도 하나의 기둥으로 설 수 있다
어찌 전철 안에서뿐이랴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내 이웃 또 이웃들이 보이지 않는 언덕이 되어 줄 때 나도 하나의 언덕으로 설 수 있다
윤수천 시인 / 꽃은 밤에도 불을 끄지 않는다
한 목숨 다 바쳐도 좋을 사랑 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깊이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시간은 항상 짧은 것 더 이상 서성거릴 시간이 없다
사랑의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놓친 열차는 절대로 아름답지 않다
적극적인 사랑 오, 적극적인 사랑 사랑 사랑
지옥에 떨어져도 후회하지 않을 사랑 있다면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깊이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시간은 항상 짧은 것 더 이상 서성거릴 시간이 없다
윤수천 시인 / 녹차를 마시며
그대를 생각한다 추운 겨울날 팔달산 돌아 내려오다가 녹차 한 잔을 나누어 마시던 그 가난했던 시절의 사랑을 생각한다
우리는 참 행복했구나 새들처럼 포근했구나
녹차를 마시며 그대를 생각한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따뜻했던 우리의 사랑을 생각한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도언 시인 / 창백한 스타인 씨* (0) | 2020.12.28 |
---|---|
안이삭 시인 / 시크릿쥬쥬 (0) | 2020.12.28 |
장선희 시인 / 폴라 익스프레스 (0) | 2020.12.28 |
서동균 시인 / 복도를 걷는 (0) | 2020.12.28 |
석미화 시인 / 욕조에 사해를 풀고 (0) | 2020.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