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삭 시인 / 시크릿쥬쥬
레이스 달린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가요. 손가락의 각도에 따라 오늘의 메뉴가 정해지죠. 당신과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입술색깔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는 일.
허리에 감긴 당신의 팔에 체중을 싣고 미끄러지며 춤을 추죠. 격정적인 턴 동작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눈을 감아요.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날개 뼈에서 찰랑거리네요. 수많은 남자들의 손이 우연을 가장하고 내게로 뻗을 때 당신은 더욱 사랑하죠. 나를 품에 꼭 안는 것도 바로 그때죠.
파티는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고 불이 꺼지고……. 문이 닫혀요. 당신이 선택한 표정 (입 꼬리만 살짝 올리고 웃는)때문에 파르르 떨고 있는 것 아세요? 졸라맨 허리띠를 풀고 싶어요. 구두도 벗고 싶어요. 찻잔과 테이블과 머리장식들을 우르르 치마위에 쏟아놓고, 당신은 떠나요. 파티는 갈수록 뜸해지고 나는 늙지도 못하고 기다려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당신만을 사랑하는 건 끔찍해요. 사랑을 믿어요 그러니 제발, 나를 그만 버려주세요!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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