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설 시인 / 바퀴의 창고
당신이 가려던 곳을 찾았어요 참 넓은 그곳에선 갈참나무가 희미한 꽃을 피우고 자전거 바퀴가 사슴벌레를 먹어요
플라타너스 그늘이 보이면 당신은 모습을 드러내고 아이들은 거미의 흙바닥을 뛰어다녀요
날카롭게 닫힌 문은 언제 열리나요 알 수 없는 소리 들을 수 없는 소리는 창밖에 널어놓아요 둥근 돌로 방문을 고정시켜 햇살을 불러와요 한 끼 거른 거미줄이 눈부시겠죠
그래도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
기대하지 않아도 마주하는 당신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아요
덜컹거리는 길은 물웅덩이만큼 깃대를 꽂고 어디에든 깃발은 물빛에 넘쳐나요
무심코 돌린 궤적을 허공에 저장해보아요 저, 비어 있는 동공의
문설 시인 / 중심이라는 말
박수 한번 주세요 모든 행동은 리액션이다
모든 사람들은 나와 다른 장소에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빛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때론 벼락을 맞는다 입술이 파래지면 어혈은 몸속으로 파고든다
덩어리로 되어 단단하고 심장을 누르면 통증이 발광을 한다
쓰다듬는다고 꽃이 피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잠들기 전에 물러앉아 쉬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서서 보면 더 멋있어 저것은 뭘까
문설 시인 / 붉은
태양을 피해 숨어버린 적 있다
해야 할 말들을 속에 간직하면 진실의 단편들이 어긋나기 시작하지
역류성 반응들이 범람해 불투명한 미래가 만성염증처럼 도사린다
등락을 반복하는 꺾은선그래프 같은 어제와 오늘 예견된 보통의 날들이 스치고 갈급한 마음도 시들해진다
나는 어떤 견해에 포함되어 있다 낯선 누군가와 맞추는 걸음과 시선은 몹시 어색하다
귀걸이를 하기 위해 귀에 구멍을 뚫는다
반짝인다 한 방울의 붉은
문설 시인 / 태양이 지고 있으므로
마녀는 우리 주변에 있다
동전이 바닥에 구른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 하늘과 구름 사이를 날며 기도한다
큰소리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법 이미 이루어진 것과 이루어질 것은 소리를 통해 확률을 높인다
구름과 구름사이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하늘에 떠 있으면 안다 지상의 꿈이 얼마나 빈한한지
왼쪽으로 기울었을까 오른쪽으로 기울었을까 불안한 기도가 비난처럼 피었다 진다
언젠가 쓸어버릴 수 없는 속도를 찾겠지
나는 스페인 광장의 플라멩코를 탐닉하고 당신은 파티마 대성당의 기적을 삼키고
오금이 저리도록 속삭여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
동전이 허공을 구른다
문설 시인 / 봄은 땅을 파고
봄에 대한 생각은 봄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였습니다
보이는 만큼 가다 보면 봄에게 갈 수 있어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면 사랑이 시작되지요
제3의 공간이 필요해요 나만의 아지트를 만드는 오래된 버릇이라고
봄은 땅을 파고 솟아나요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고 나와 상관없이 진행되지요
봄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언제나 깨어나듯이
사막의 끝에서 바다를 만나지요 모든 생각의 밑둥이 빠져요
텅 빈 거울 속 봄이 완벽하게 웃고 있네요
문설 시인 / 죽은 시간 밖에서
꽃을 지우니 모습이 기억나질 않는다
표정을 버린 저 이파리들 봄을 만나 어떤 옷을 입고 외출했는지
연기처럼 사라진 기억이 죽은 시간을 한 칸씩 불러들인다
폭설처럼 길에서 마주치는 무성한 입의 가시들
허리 휘지 않아도 입 없이 태어나는 것들 금세 잊혀 붉은 입술이 되고 얼굴은 등 돌려 뿌리를 걷어차고
허공 휘어지게 잡고 있는 가지의 외면은 얼마나 두려운 곡예인가
소문 이후에도 감정 이전에도
차마 기억나지 않는 열매를 달고 보내지 않아도 종종걸음으로 꽃은 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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