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남 막달레나 시인 / 석모도에서
1 마지막 배를 놓쳤다 눈 시리게 건너다보이는 석모도는 푸른 숨소리로 가라앉고 밤이 자욱한 바다가 갈매기 깃털로 날고 있었다
파장을 하며 뱃사람들 새우젓 통마다 비린 하루를 담아 소금기 많은 입김 불며 고단한 장화를 끈다 젖은 귀가歸家를 한다
누구의 삶이 이렇지 않을까 여섯시 막배를 타기 위해 달려온 나를 두고 떠나가는 여객선의 뒷등을 안개에 실려 보내며 상한 팔 휘젓는 방조제
내 갈 섬은 저긴데 바로 저 긴데
2 여관방에 든다 제때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위한 빈 숙소는 조용하다 간간이 잊을 듯 창마다 고이는 바람소리, 별이 부딪는 소리
불면不眠의 커튼을 벗긴다 먹다 던진 능금처럼 그믐달 야윈 시월을 끌어안고 바다는 검은 살을 드러내며 산란기를 예고하고 있다
담배를 사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제 할 일이 없다고 생각 한다 나를 붙들고 있던 바다의 팔을 달래듯 푼다
3 부기 오른 석모도의 아침에 발을 디딜 때 축축한 햇살에 핏기 오르는 마을의 향기
보문사 쪽으로 가는 즈음 코스모스 흐드러진 석포리 이정표에서 무엇을 보았던가 경사傾斜를 바로잡지 못할 스무 살 적 달콤한 연정의 즙을 맛보았던가
가뭇 속옷이 얼추 내려진 빨간 사과들 부끄럽게 배꼽 내민 채 눈인사 걸어오고
쿵 쿵 뛰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뽀얀 흙먼지 속에 설핏 깨어나는 햇살들 박처럼 아득히 열린 가을 풍경 속에서 내가 살던 고향을 보았을까
4 은어 떼로 몰리는 정오의 햇살을 뚫고 낚시꾼들은 저마다 바다에 깃발을 꽂는다
질긴 기다림의 혹은 설익은 길을 바다에 묻고 있다
갯지렁이 꿈틀거리는 우문愚問을 바늘에 튼튼히 꽂고 나 역시 대나무 휘어지도록 낚싯대로 바다를 자르고 있다
내가 낚아내야 할 몇 가지 추억과 대답을 바다에 묻고 있다
5 다시 밤, 빈 낚시 바구니에 가득 고인 소금꽃으로 부딪는 은백의 별빛을 챙기고 던져두었던 질문들을 낚아 올린다
나는 내게 부탁 한다 석모도에서 돌아갈 땐 침묵할 것, 너의 시詩에게조차.
김광남 막달레나 시인 / 죽음
손수 씻을 수 없는 아버지의 몸을 우리가 염해드렸습니다
매일 새벽미사를 드리러 관절염을 앓던 다리로도 당당히 들어서시던 성당에 우리가 당신을 메고 들어갔습니다
혼자 걸어가실 수 없는 무덤까지 우리가 들어드렸습니다, 당신의 집에 조심히 눕혀드렸습니다
그토록 신세 지기 싫어하셨어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김광남 막달레나 시인 / 그 힘 -박소영 시인에게
플라타너스 가로수 한 그루 떡 버티고 있는 자리만 눈이 녹질 않았다.
그대, 내 마음에 버티는 절체절명의 그리움, 절대 녹지 않는 그 힘이여!
김광남 막달레나 시인 / 몸 감옥으로부터의 편지
그는 삼나무 숲을 지고 왔다 숲에는 망가진 안개 다발들과 어디를 헤매다 왔을까 발목까지 빠질 듯 질척한 석양 더미와 캐다 만 봄 햇빛의 구근 부스러기들로 산발한 신발이 부어있었다
여자가 되고 싶다고, 그는 울먹였고 흔들렸다
열두 살부터 온몸에 피어나는 여자의 색깔과 향기를 벗을 수가 없다고, 억지로 밀어붙인 몸에서 너덜대는 성기 하나만 제거할 수 있다면 겨우내 얼음 바위로 잠긴 눈에서 삽 십 칠년 숨겨온 계곡물이 흘러내렸다
벌목 안 된 시간은 지치고 무덤에서 자꾸 태어나는 비명의 아이들 - 어머니, 당신이 내게 준 계절은 무엇인가요, 분홍이 내리 번지는 산골마다 분분한 진달래꽃 잎에 입술 타오르는 적요는요 - 아버지, 형벌인가요, 왜곡된 운명인가요, 당신을 닮지 않으려 도망친 마을마다 부감으로 쫓아오는 악몽들을 이젠 스스로 추억하고 싶습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환절기, 돌아갈 수 없다면 나의 꿈은 우거진 편견의 어둔 덤불을 헤치고 남은 에움길을 계속 적어 걷는 것
욕망으로 무거워지는 삼나무 숲에 온 몸을 가리고 또 걷고 견디며 살아 온 페이지들을 젖은 수피에 적는 것
무수한 갈림길에서 떠나간 접속사들을 불러 화해시키고 몇몇 휘어진 부정사 껍데기를 떼어내며 적어 다시 내일 밤을 묵묵해지는 것
분별없는 보름달과 구별 없는 별들이 검은 눈망울로 너덜대는 삼나무 편지를 내려다 본다
벙어리 하늘이 텅 빈 자궁으로 깊어진다.
김광남 막달레나 시인 / 그들은 어쩌죠?
도토리 전문 식당에서 고등학교 동기 열 두 명이 도토리국수를 저녁으로 먹었어요
도토리전도 시켰어요 옆 테이블에서 먹는 게 맛있어 보여 도토리묵도 세 접시 추가 했어요
인간들이 모조리 먹어 버리는데 다람쥐들은 뭘 먹죠?
산에는 편의점도 없을 텐데 다람쥐들은 천원도 없을 텐데!
모링가환을 선물로 받았어요 베트남에서 자란 모링가잎으로 만든 환약들 하얀색 플라스틱 병에 담겨 건어 온 베트남 태양 베트남 바람 베트남 흙
안락의자에 앉아 먹기에 딱 알맞은 크기 모링가환의 효능 복용법을 꼼꼼히 읽고 모자람 없는 내 잉여 건강을 챙기며
허기진 베트남 염소들의 울음소리가 섞인 모링가환 서른 알을 우아하게 입안에 털어 넣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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