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문재 시인 / 자기소개서
내가 만약 입사기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쓴다면
개와 소와 메뚜기와 개구리와 함께한 추억을 코흘리개 짝꿍과의 우정을 자랑할 수 있을까?
강아지를 쓰다듬은 마음을 참새를 바라본 눈길을 막장 속에서 살아가는 쥐 이야기를 인감도장처럼 찍을 수 있을까?
추모사업회의 후원을 광장의 구호를 병방 작업조 광부들의 밤참을 경력처럼 내세울 수 있을까?
탄가루 묻은 공기를 파란색 보자기에 싼 아버지의 도시락을 상장처럼 꺼낼 수 있을까?
맹문재 시인 / 착지점, 이자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비행기에서 낙하하는 꿈을 가끔 꾼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위에는 보트가 떠 있는데 필승! 충성! 같은 군대 구호나 안전! 제일! 같은 공단의 구호가 착지점의 표시로 박혀 있어 낙하산을 조종하며 내려간다
그런데 말일인 어제의 꿈에서는 이자(利子)란 구호가 보트 위에 새겨져 있어 나는 경악했다 의아스럽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안 내려갈 수 없어 이자! 이자!
바다에 빠지지 않고 내려앉은 다음날 나는 아파트 관리비며 도시가스비며 전기세며 아이들 학원비를 구호를 외치며 납부했다
(시집 "책이 무거운 이유" 중)
맹문재 시인 / 주인
마을의 공동 수도에서 목을 축인 뒤 수도꼭지를 잠그려는데 잘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내리누르기도 했지만 졸졸 떨어지는 물줄기를 막을 수가 없었다 많이 흐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놔둔 채 떠날 수 없어 나는 계속 잠그려고 했다 그래도 낡은 수도를 갈 수 있는 인물인데 몇년 만에 찾은 고향에서 수도꼭지를 잠그는 동안에도 나는 배운 사람이라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때 이웃의 할머니께서 다래끼를 허리에 매고 자박자박 걸어오셨다 어렸을 때 나를 업어주기도 한 분이셨는데 다래끼 안에는 상추가 병아리들처럼 소복이 들어 있었다 나는 손님을 끌기 위한 가게 주인처럼 얼른 다가가 어디를 다녀오시느냐고 여쭈었다 이놈의 날씨 뒈져뿌러라 할머니는 내 인사의 답으로 한바탕 욕을 해대면서 두꺼비 같은 눈으로 웃으셨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틀어 목을 축이고 나서 곧바로 잡근 뒤 다시 자박자박 가셨다
아무렇지도 않게 수도꼭지를 열고 잠근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도 해볼까, 또 물이 흐를까 겁이 나 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마을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서서히 들었다
(시집 "책이 무거운 이유" 중)
맹문재 시인 / 아름다운 푯대
공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가 뒤편의 산마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발견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꽃들은 말갛게 쓸린 오후의 골목길처럼 깨끗했고 미인의 귓불처럼 발그레했고 세상살이가 좋기라도 하다는 듯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저 꽃들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나는 몇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지만 부끄러웠다 쇳가루를 뒤집어쓴 시커먼 공장을 아름다운 푯대로 삼으려고 했던 내가 꽃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니
공장을 품고 살아가겠다는 내가 꽃 앞에서 강박관념을 느끼는 존재라니
나를 흔들고 있는 아름다운 푯대여
(시집 "책이 무거운 이유" 중)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기연 시인 / 꿈의 판화 외 3편 (0) | 2021.09.23 |
---|---|
문인수 시인 / 간통 외 1편 (0) | 2021.09.23 |
민왕기 시인 / 시절 외 5편 (0) | 2021.09.23 |
김광남 막달레나 시인 / 석모도에서 외 4편 (0) | 2021.09.23 |
문설 시인 / 바퀴의 창고 외 5편 (0) | 2021.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