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연 시인 / 꿈의 판화
허공이에요 토실한 나무가 주먹만한 꽃을 내달아요 연분홍 꽃 위 노란 꽃 사이 별들이 툭툭 불거져요 나무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꽃을 입에 문 물고기가 헤엄쳐 와요 집 한 채 오도카니 나뭇가지에 돋았네요 연둣빛 창 금세 환해요 지붕 아래 방 한 칸 그 집의 전부예요 뽀글뽀글 이야기가 끓어요 별들이 체위를 바꿀 때마다 다섯 꼭짓점을 펴며 솜사탕구름이 태어나요 몽글몽글 대문이 사라졌어요 이제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아주 정교한 당신이라는 나라예요
김기연 시인 / 나를 관람하다
시안갤러리 뒤뜰 대숲 아래 댕강 머리 없는 맨 몸의 석상들 나란히 앉아 고민 중이다
볼록한 아랫배 가운데로 모은 두 발 발가락이 일곱이다 세운 무릎에 왼손 올려두고 늘어뜨린 오른팔 종아리 근처에서 스리슬쩍 손을 버렸다 B컵 왼쪽 가슴 탱글탱글한데 흉터조차 남지 않은 오른쪽 가슴은?
아, 저들은 지금 가슴으로 생각한다 똥배로 생각한다 왼손으로 생각한다 일곱 발가락으로 생각한다
버젓이 머리 버리고 생각 깊다 詩!
김기연 시인 / 다솔사 누드
다솔사 앞마당에 불에 탄 느티나무 한 오백 년 살고 있다 죽음의 화평은 누드임을 몸소 설파 중이다 살아온 습성의 자리일까 움푹 파진 아랫도리, 낯선 마음 붙잡아 세운다 이왕지사 컴컴한 그 품속으로 한 사람 또 한 사람 들어가 키득거려보는데 그 순간만은 그들 오롯이 나무이지 않겠는가 단란한 관 속의 한 때랄까 죽음도 나이가 되는 느티나무, 이래저래 손을 타긴 탔나보다 수척하다
다시 찾은 다솔사 검은 누드의 아랫도리에 밥그릇만한 목불상 독방 차지다 그 품에 들지 못한 마음 서운해져서는 깊고 웅숭한 뒷간에 오줌발 갈기는데 해지는 오후 잠시 왁자해졌다
하늘 안감으로 짜놓은 추억의 사닥다리 다솔사 누드 천리 밖 그대이다
김기연 시인 / 어제, 내일과 오늘 - 구본창,「Hands of Time Ⅱ」, 1996
캄캄한 도화지 위 왼손 오른손 나란히 바닥을 드러내고 멈추었다 무수한 길 멎어 있다
도화지 스르르 뽑아내면 저 두 손 거짓말처럼 뒤집어 미세한 길들 말아 쥐고 달아나지 않을까
왼손 약지에 걸린 둥근 반지의 흉터 상처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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