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실 시인 / 메타버스
공손한 고글을 쓴다 고글 속 까페는 브런치에 능하다
아바타가 친구 아바타를 소개한다 그의 눈에 내 눈알이 딱 들어맞는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멈추지 않는 이 세계는 불투명한 꽃병이다
갈라진 곳에서 더 갈라지고 비밀 아래 비밀의 뿌리가 누워 있다
공공연한 우리가 손톱을 나눠 먹고 무한 복제 된다
하나는 일터에 하나는 하느님께 또 하나는 파란 픽션에 복무한다
방부제에 담근 해가 잠깐 죽는 사이 흰 마네킹들이 도로를 활보한다
공손한 고글 위에 무한반복 되는 생일들 뛰면서 자고 걸으면서 꺽이는 멜랑콜리아
놀랍게도 나는 일요일의 화자話者다
고훈실 시인 / 식물성 변기
책은 층계처럼 빙글빙글 돈다 나선형의 질문이 몇 백 년째 증발 중이다 인기척을 녹여 입을 닫을 시간이 필요하다 달팽이 껍질조차 벗지 못한 제목들이 괄약근에 힘을 준다 지독한 항변이다
둘코락스 두 알을 삼킨다 분서갱유의 불꽃이 노랗게 튄다 제멋대로 날아 오른 문장이 낭설 속에 휘발한다 언어의 부침과 인양이 엘피판처럼 돈다 쇄골에 갇힌 오독이 진물을 흘린다 변의가 책날개의 문장을 후들하게 비빌 때
오 분 후에 화장실로 가세요 금방 쏟으면 변비가 안 풀려요
화장실에 반만 남은 수건이 걸려있다 거울 반대편의 반대에는 귀깔 난 낭독이 똑똑 떨어진다 놓칠 수 없는 표정의 완성, 변기가 한 장 씩 기울어진다 펄럭이는 밑줄이 비린내를 풍긴다 똥이 터진다
환풍기가 돌아간다 진술의 구멍이 살짝 열린다 아직 밑이 묵직하다 숲을 깔아뭉갠 새들이 허공을 쏜다 기억의 변비는 손가락 마디에 스민다 내게도 서책의 버릇이 남아 있다 굴광성으로 휘는 목이 빙글빙글 돈다
시집 『3과4』2021 부산시인 봄호
고훈실 시인 / 한밤의 누슈✳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내게서 멀어지게 하는 기도가 들립니까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가졌으므로 외국인처럼 말을 합니다
미지의 시간 앞에 재발명되고 재발견되어야 하는 것들 나를 뚫고 나오는 말과 서늘한 당신의 문법은 모호합니다 서로 어긋나기 위해 맞이하는 순간들 탐험이 모험을 모르듯 우리는 사전에 없는 말을 만들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만 나의 기호는 당신을 모릅니다
우리가 한 침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끝내 알 수 없고 순간의 황홀은 비출수록 어두워집니다 독해가 어려운 감정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갑니다
한밤은 배달되지 않습니다 갓 죽은 말이 갓 구운 빵이 돼 향기를 올립니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언어로 난 당신에게 갑니다 죽을 때까지 나는 안전치 못할 것입니다
✳누슈(nushu): 약 400년 전 중국 여성들이 만든 자기들만의 은밀한 언어, 남자들은 해독 불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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