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설 시인 / 선잠
서툴지 않은 처음은 시작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그은 선은 정말 아무렇지 않고 나는 점과 잠이 만들어낸 색에 선명해집니다 당신이 그린 그림이 춤을 추면 당신도 춤을 출까요 그림이 그림의 무덤을 파고 덧칠을 할 때 나는 어둠에 잠긴 감정의 파도를 표절합니다 바다의 색깔은 도무지 알 수없는 벼랑입니다 당신의 표정은 당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색깔이겠지요 내일은 오늘의 제자리, 붓끝이 그 끝을 감추면 그림의 모서리마다 모래알 같은 불안이 피어납니다 풋풋한 피톨이 짙은 안개에 덮인 화폭을 지나갑니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면서 잠의 꿈에 젖어들든 몽유의 숲에 풍경이 한창입니다만 내가 눈을 뜨면 풍경은 풍경을 모릅니다 혹시 티가 나나요 무심결에 죽은 삶을 드러냈나요 설핏, 내 눈을 밟고 간 당신은 누구의 처음일까요
문설 시인 / 시시한 덫에 걸리다
익선동 골목 일층 양옥 카페에서 카베르네 소비뇽이 녹아내린 붉은 잔을 높이 들었다 왜 하필 나를 노렸을까 황급히 눈을 감았다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딘가 생각은 빠르게 물들고 쉽게 어긋나기도 했다 자꾸만 이명이 들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고 거부할 수 없는 어떤 동작을 취하며 서럽게 울었던 거다 반목과 냉담을 오가며 눈치를 구르는 귓속말도 희미하게 들렸다 모든 메뉴에는 수프가 나오지 않았다 카드는 결제가 거절되었고 화장실은 카페 문을 나설 때까지 잠겨있었다 은빛 세단을 빌려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는 달에 용한 점집을 찾아가기로 우리는 대략 합의를 했다 서늘한 웅성거림이 몸의 중심을 흔들고 있었다
문설 시인 / 고양이 자세
반죽 한 덩어리 놓여 있다
꼬리를 감추고 주변을 경계하다 죽은 듯 숙면이다
생각의 구덩이를 지나 생각의 늪 속에 뒤틀린 자세로 흘러들었다 저 문을 두드리는 달콤한 늑대 창문을 깨고 도망치면 낯선 지붕의 꽃이 쏟아질까 영역 밖은 고스란히 상처였다
날개의 자세로만 닿을 수 있는 곳 서풍받이 절벽이 10억 년의 표정으로 서있다
모자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양이가 날개를 턴다
새벽을 꽉 문 생선이 날아다닌다
문설 시인 / 하이힐
아파트 현관 우편함 아래 구두 한 켤레 놓여 있다
까지고 색 바래 더 이상 내려 갈 곳 없는 외출에 회색 벽 앞에서 맨발로 까치발을 딛고 있다
펄럭이는 방향으로 현관을 나선 발들은 어깨를 부딪쳤다 돌아오고
아무리 높아도 발목 위로 돋아난 적 없는 발 아닌 발이 즐거운 기형을 앓고 있다
쓸모가 아직 왕성한데 배 불룩한 고양이 한 마리 냄새만 맡고 그냥 간다
또각또각 벽에 일렁이는 그림자 벽을 바꾸고 굽은 발가락 소리 요란하다
문설 시인 / 질문의 거울
아주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있다
시간이 없어 안 웃는 것이 아니라 웃겨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웃을 일이 없어 웃지 않는 것이지 웃을 수 있어요 한 동안 웃는 법을 잊어버린 적이 있어요 잘못했던 선택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요 웃을 일이 있어 웃는 것이지 웃을 수 없어요
여기 어디에요
내가 왜 이러고 있지요
강물의 유두를 더듬어 돌아 온 곱사연어는 잘 살고 있을까요
바닥에 떨어진 어린 수리부엉이는 개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까요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처음 듣는 순간 내 삶을 흔드는 소리가 몹시 작게 느껴졌어요
내 뜻은 아니에요
사랑은 사랑이어서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있어요
사람은 사람이어서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있어요
내 뜻은 아니에요
내 눈에 빈틈이 보여요
다, 당신 뜻이에요
모서리가 직각인 신(神)을 숭배한 적 있어요
문설 시인 / 얼음의 불
얼음에 입술 데인 적 있다 얼음에도 불이 숨어 있었다니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불꽃은 북극에도 적도에도 있고 녹지 않는 사막에서 여우가 빙하를 주유한다 여우의 꼬리는 혀를 닮아 얼음의 둘레를 살살 더듬기도 하지만 얼음은 깨물어 먹는 동안의 즐거움 사각의 시원함 대신 사막의 서걱임을 동경한다 처음부터 즐거워지려는 속내는 아니었다 원시는 차갑고도 차가워 혀에서 뿔이 자란다 그것도 한때 불이었다 그 불에 데인 적 있다 모래 같은 믿음은 뒤통수를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말은 말을 낳고 화인(火印)이 깊게 박힌다 폭염이 지상에 오래 머물고 있다 불을 다스리는 건 남겨진 자의 몫이다 사물은 같은 형태로 오래 지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깨물어 먹은 건 얼음이 아니라 불이었다 입 안 가득 얼음을 돌리며 간신히 숨을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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