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녀 시인 / 잎의 말
어찌 새순만 고우랴 꽃망울만 어여쁘랴
꽃 진 자리에 돋아난 새잎은 크고 작은 생명을 여름 내내 품어 기른다
큰 바람이 지나고 푸르던 잎 가을 볕에 몸 뒤집어 봄꽃보다 더 붉게 타리라
실바람에 허공 반 바퀴 쯤 돌아 지상에 몸져누우면
어느 고운 손에 이끌려 꽃잠에 빠질 수도 책갈피가 될 수도 마음 다 잡아 손 흔들고 다시 붉어지던 어릴 적 꽃봉오리
김두녀 시인 / 꽃에게 묻다 - 아침고요 수목원에서
쪽빛 하늘 아래 가을바람 살랑이던 수목원. 혹서를 이겨낸 달구벼슬꽃 핏빛 그리움은 촛불로 사위어가고, 니겔라, 에니시다, 후룩스의 반갑다는 손사래에 피의 천남성 눈 부릅뜨네.
허리 휘청이던 볼 붉은 노인장대 수줍은 색시인 양 치맛자락 올려 잡네. 앙증맞은 금꿩의 다리, 족두리 쓴 풍접초, 엷은 미소로 살랑살랑 꼬리 흔들던 꽃범의 꼬리 눈 뗄 수 없는 환희의 나라에서
흰 구름 몰려있는 듯 다가가니 나무수국 달콤한 꽃향 뿜어대네. 날 밀치던 댓바람 나무수국 보쌈하듯 쓸어안고 수런대던 나무들 온몸 뒤집네. 한낮의 열기에 가슴 데일라 뒷걸음질치던 호숫가
막다른 골목에서 낯익은 꽃에게 또 이름을 물어보네. 열 번을 대답해도 못 듣는 귀. 꽃박사 알아채고 그 이름 불러주니 낭랑한 목소리에 밝아지던 귀와 눈.
김두녀 시인 / 길 위의 가을
늦가을 나무들은 사정없이 옷을 벗고 가지에 아직 매달려 있던 잎 바람 타고 좁은 어깨 툭 치며 내려앉을 때 동무를 만난 듯 반갑다
안개비에 젖은 아기단풍 물방울 머금고서 늦도록 나보다 더 붉은 녀석 있으면 나와 보라 눈에 힘을 준다
이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젖은 땅에 엎드린 아기단풍잎을 보고 허리 굽혀 뜨거운 손 갖다 대니 녀석은 바르르 떨며 괜찮다, 괜찮다 한다
손 안에 든 아기단풍잎이 따뜻해져 뒤돌아보는 나의 길 가을은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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