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두녀 시인 / 잎의 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3.

김두녀 시인 / 잎의 말

 

 

어찌 새순만 고우랴

꽃망울만 어여쁘랴

 

꽃 진 자리에 돋아난 새잎은

크고 작은 생명을 여름 내내

품어 기른다

 

큰 바람이 지나고

푸르던 잎

가을 볕에 몸 뒤집어

봄꽃보다 더 붉게 타리라

 

실바람에 허공 반 바퀴 쯤 돌아

지상에 몸져누우면

 

어느 고운 손에 이끌려

꽃잠에 빠질 수도

책갈피가 될 수도

마음 다 잡아 손 흔들고

다시 붉어지던 어릴 적 꽃봉오리

 

 


 

 

김두녀 시인 / 꽃에게 묻다

- 아침고요 수목원에서

 

 

쪽빛 하늘 아래 가을바람 살랑이던 수목원. 혹서를 이겨낸 달구벼슬꽃 핏빛 그리움은 촛불로 사위어가고, 니겔라, 에니시다, 후룩스의 반갑다는 손사래에 피의 천남성 눈 부릅뜨네.

 

 허리 휘청이던 볼 붉은 노인장대 수줍은 색시인 양 치맛자락 올려 잡네. 앙증맞은 금꿩의 다리, 족두리 쓴 풍접초, 엷은 미소로 살랑살랑 꼬리 흔들던 꽃범의 꼬리 눈 뗄 수 없는 환희의 나라에서

 

 흰 구름 몰려있는 듯 다가가니 나무수국 달콤한 꽃향 뿜어대네. 날 밀치던 댓바람 나무수국 보쌈하듯 쓸어안고 수런대던 나무들 온몸 뒤집네. 한낮의 열기에 가슴 데일라 뒷걸음질치던 호숫가

 

 막다른 골목에서 낯익은 꽃에게 또 이름을 물어보네. 열 번을 대답해도 못 듣는 귀. 꽃박사 알아채고 그 이름 불러주니 낭랑한 목소리에 밝아지던 귀와 눈.

 

 


 

 

김두녀 시인 / 길 위의 가을

 

 

늦가을 나무들은 사정없이 옷을 벗고

가지에 아직 매달려 있던 잎 바람 타고

좁은 어깨 툭 치며 내려앉을 때

동무를 만난 듯 반갑다

 

안개비에 젖은 아기단풍 물방울 머금고서

늦도록 나보다 더 붉은 녀석 있으면

나와 보라 눈에 힘을 준다

 

이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젖은 땅에 엎드린 아기단풍잎을 보고

허리 굽혀 뜨거운 손 갖다 대니

녀석은 바르르 떨며

괜찮다, 괜찮다 한다

 

손 안에 든 아기단풍잎이 따뜻해져

뒤돌아보는 나의 길

가을은 황홀하다

 

 


 

김두녀(金斗女) 시인(서양화가)

전북 부안 출신. 전주교육대학교 회화과 졸업, 미술특기 교사 재직, 1994년 <해평시>에 '바가가 불렀다' 외 9편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고양지부장 역임, 상황문학 직전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서울시인상, 경기도문학상 본상 수상, 시집 <여자가 씨를 뿌린다> <삐비꽃이 비상한다> <꽃에게 묻다> <빛의 정에 맞다> 외 공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