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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욱진 시인 /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3.

김욱진 시인 /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집 한 권 냈다고

팔십 평생 땅뙈기 일구고 산 오촌 당숙께 보내드렸더니

달포 만에 답이 왔다

까막눈한테 뭘 이래 마이 지어 보냈노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를, 우린

시래기 국만 끓여 먹고 살아도 배부른데

허기야, 물 주고 거름 주고 애써 지은 거

아무 맛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어 봐도 그렇고

입맛 없을 때 한 이파리씩 넣고 푹 삶아 먹으면 좋것다

요즘은 시 나부랭이 같은 시래기가 금값 아이가

이전에 장날마다 약장수 영감 따라 와서

한 많은 대동강 한 가락 불러 넘기고

한바탕 이바구하던 그 여자

시방도 어데서 옷고름 풀듯 말듯 애간장 태우며

산삼뿌리 쏙 빼닮은 만병통치약 팔고 있나 모르것다

그나저나 니 지어 논 시

닭 모이 주듯 시답잖게 술술 읽어보이

청춘에 과부 되어 시집 안 가고 산 아지매

고운 치매 들었다하이

내 맴이 요로코롬 시리고 아프노

시도 때도 없이 자식 농사가 질이라고 했는데

풍년 드는 해 보자고 그랬는데

 

 


 

 

김욱진 시인 / 패

 

 

편을 갈라 화투를 치다 보면

패가 잘 풀리는 사람과 한 편이 되는 날은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푹 무질고 앉아 싸붙이고는 엉덩이만 들썩여도

돈이 절로 굴러들어온다

 

패라는 게 그렇다

꽃놀이패에 걸려

패싸움하다가도

팻감이 없으면

한 방에 패가망신하기도 하고

 

패거리도 그렇다

얼씬 보기엔 반상 최대의 패처럼 보여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이 패거리 저 패거리 기웃거려 보는 거다

별 밑천 없이 들락날락하기도 편하고

급할 시는 그 패를 마패처럼 내밀어

은근슬쩍 방패막이로 써먹기도 하고

 

팻감이 궁할 땐

이 패에서 저 패로

저 패에서 이 패로

철새처럼 줄줄이 옮겨 다니면서

늘상 화기애애한 척

돌돌 뭉쳐 돌아다니며 놀고먹기엔 딱 그저 그만이다

패가 폐가 되는 줄도 모르고

패거리가 난무하는 세상

 

한구석엔

패도 패거리도 아닌 부패가 암암리 도사리고 있어

나는 일찌감치 문패조차 내걸지 않았다

 

 


 

 

김욱진 시인 / 여시아문(如是我聞)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잡초 같은 생각 한 포기 불쑥 뽑아냈더니

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주인 행세 하냐고

고추가 맵싸하게 호통을 쳤다

 

봐라, 잡초 없는 세상, 어디 있더냐

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뿌리내리고

주렁주렁 자식 낳고

잠시 더부살이하다 떠나가는 이 마당

참 주인은

 

흙 한 무더기요

공기 한 숨이요

햇빛 한 줌이요

물 한 모금이요

 

저토록 무심히 베풀고 돌아가는

허공 보살님들께 경배하시라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없을 터

 

우주 한 모퉁이

나라고 우겨대는 자 누구인가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김욱진 시인 / 非비

 

 

겉보기엔 이란성 쌍둥이 같고

아니, 지네 발가락 같고

아니 아니, 자물쇠 구멍 비비대는 열쇠 같은데

非는 아니다, 아니다 그런다

관상을 보니 올곧은 성품 타고난지라

아닌 것은 아니다, 딱 잘라 말하는 선비 기질이 있고

때로는 말머리 바짝 달라붙어

은근슬쩍 비비 꼬는 노비 기질도 있어

난데없는 시시비비에 곧잘 휘말릴 거 같다

(혹자는 非가 양비론적이라고 비아냥거리겠지만)

천생 非는 非다

주인 앞에서 바른말만 콕콕하는 비비

 

새의 양 날개가 똑같아 보여도

오른쪽 날개는 왼 날개로 쓰지 못하고

왼 날개는 오른쪽에 달지 못한다

서로 맞지 않아서

아니다, 아니다

서로 아니다, 라고 하지만

새는 왼쪽 오른쪽 날개 둘이 있어야 날 수 있다

 

너와 나도 그렇다

둘이 아니다 아니다, 우겨대면서도

하나가 아니다

좌우간에 非는

똑바로 놓고 봐도 非

거꾸로 뒤집어 놓고 봐도 非

둘이 하나다

 

 


 

 

김욱진 시인 / 누에씨

 

 

시를 왜 짓는가, 라는 물음에 씨는 그냥

문득 떠오른 누에처럼 시를 짓는다고 실실 얼버무리자

누에는 금세 전생으로 돌아가 알을 슬었고

뭔가를 짓는다는 좁쌀만 한 생각으로

알은 꼬물꼬물 거리기 시작했다

까막눈으로 돌가루 종이 위에 뒹굴다가

평수 넓은 신문지로 이사 와서는

뽕잎처럼 잘게 쓴 시를 다문다문 읽는 기분으로

시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행간이 생겼고, 거기에 누워 먹고 싸고 잠자면서도

온몸에 뭔가 허전한 구석이 늘 배어 있음을 절감하고부터

누에는 자나 깨나 오고 가는 길 묻고 물으며

잠잠히 시를 짓기 시작했다

한 잠을 자고 나서는

허기를 참지 못해 뽕잎에만 눈독을 들였다고

두 잠을 자고 나서는

뽕잎에 딸려온 오디 맛을 난생 처음 보았고

어딘가에 뽕나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였다고

석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허구 많은 시상이 눈앞에 아른거려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넉 잠을 자고 깨어나서는

섶처럼 얼기설기 얽힌 이 세상

나 아닌 나가 없더라고 한 줄 딱 적었다

그 순간, 누에는 오간데 없고

나는 한 마리 번데기 되어

누에가 지어놓은 집 단박에 다 부숴버리고

시 한 수 읊고 돌아가는 나

방이었다

 

 


 

 

김욱진 시인 / 수상한 시국‧3

 

 

동계 방학 자가 연수 중

코로난가 뭔가 불쑥 찾아와

현관 문고리 잡고 가는 바람에

우리 부부 자가 격리 중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먼

그러잖아도 각방거처 선언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눈칫밥 한 그릇 얻어먹고 살기도

쉽잖은 팔자인지, 눈만 뜨면

손 씻고 마스크 끼고

한 끼 먹은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각자 설거지하고 소독하고

화장실 드나들 땐

변기 거울 빚 갚듯

반질반질 다 닦아 줘야 하고

온종일 건네는 말이라고는

밥 먹자, 라는 한 마디

그마저도 눈치 보며 주고받는 일상

지금, 여기, 나는

자가 수양 중이다

자가, 누구인지

자가, 왜 여기 머물고 있는지

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 혼자 조용히 묻고 있는 중

 

 


 

김욱진 시인

1958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경북대 사회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3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슬산 사계』, 『행복 채널』, 『참, 조용한 혁명』, 『수상한 시국』과  2020년 전 세계 시인들의 코로나19 공동 시집『地球にステイ(지구에 머물다)』가 있음. 2018년 제 49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 우수상 수상.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