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진 시인 /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집 한 권 냈다고 팔십 평생 땅뙈기 일구고 산 오촌 당숙께 보내드렸더니 달포 만에 답이 왔다 까막눈한테 뭘 이래 마이 지어 보냈노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를, 우린 시래기 국만 끓여 먹고 살아도 배부른데 허기야, 물 주고 거름 주고 애써 지은 거 아무 맛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어 봐도 그렇고 입맛 없을 때 한 이파리씩 넣고 푹 삶아 먹으면 좋것다 요즘은 시 나부랭이 같은 시래기가 금값 아이가 이전에 장날마다 약장수 영감 따라 와서 한 많은 대동강 한 가락 불러 넘기고 한바탕 이바구하던 그 여자 시방도 어데서 옷고름 풀듯 말듯 애간장 태우며 산삼뿌리 쏙 빼닮은 만병통치약 팔고 있나 모르것다 그나저나 니 지어 논 시 닭 모이 주듯 시답잖게 술술 읽어보이 청춘에 과부 되어 시집 안 가고 산 아지매 고운 치매 들었다하이 내 맴이 요로코롬 시리고 아프노 시도 때도 없이 자식 농사가 질이라고 했는데 풍년 드는 해 보자고 그랬는데
김욱진 시인 / 패
편을 갈라 화투를 치다 보면 패가 잘 풀리는 사람과 한 편이 되는 날은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푹 무질고 앉아 싸붙이고는 엉덩이만 들썩여도 돈이 절로 굴러들어온다
패라는 게 그렇다 꽃놀이패에 걸려 패싸움하다가도 팻감이 없으면 한 방에 패가망신하기도 하고
패거리도 그렇다 얼씬 보기엔 반상 최대의 패처럼 보여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이 패거리 저 패거리 기웃거려 보는 거다 별 밑천 없이 들락날락하기도 편하고 급할 시는 그 패를 마패처럼 내밀어 은근슬쩍 방패막이로 써먹기도 하고
팻감이 궁할 땐 이 패에서 저 패로 저 패에서 이 패로 철새처럼 줄줄이 옮겨 다니면서 늘상 화기애애한 척 돌돌 뭉쳐 돌아다니며 놀고먹기엔 딱 그저 그만이다 패가 폐가 되는 줄도 모르고 패거리가 난무하는 세상
한구석엔 패도 패거리도 아닌 부패가 암암리 도사리고 있어 나는 일찌감치 문패조차 내걸지 않았다
김욱진 시인 / 여시아문(如是我聞)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잡초 같은 생각 한 포기 불쑥 뽑아냈더니 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주인 행세 하냐고 고추가 맵싸하게 호통을 쳤다
봐라, 잡초 없는 세상, 어디 있더냐 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뿌리내리고 주렁주렁 자식 낳고 잠시 더부살이하다 떠나가는 이 마당 참 주인은
흙 한 무더기요 공기 한 숨이요 햇빛 한 줌이요 물 한 모금이요
저토록 무심히 베풀고 돌아가는 허공 보살님들께 경배하시라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없을 터
우주 한 모퉁이 나라고 우겨대는 자 누구인가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김욱진 시인 / 非비
겉보기엔 이란성 쌍둥이 같고 아니, 지네 발가락 같고 아니 아니, 자물쇠 구멍 비비대는 열쇠 같은데 非는 아니다, 아니다 그런다 관상을 보니 올곧은 성품 타고난지라 아닌 것은 아니다, 딱 잘라 말하는 선비 기질이 있고 때로는 말머리 바짝 달라붙어 은근슬쩍 비비 꼬는 노비 기질도 있어 난데없는 시시비비에 곧잘 휘말릴 거 같다 (혹자는 非가 양비론적이라고 비아냥거리겠지만) 천생 非는 非다 주인 앞에서 바른말만 콕콕하는 비비
새의 양 날개가 똑같아 보여도 오른쪽 날개는 왼 날개로 쓰지 못하고 왼 날개는 오른쪽에 달지 못한다 서로 맞지 않아서 아니다, 아니다 서로 아니다, 라고 하지만 새는 왼쪽 오른쪽 날개 둘이 있어야 날 수 있다
너와 나도 그렇다 둘이 아니다 아니다, 우겨대면서도 하나가 아니다 좌우간에 非는 똑바로 놓고 봐도 非 거꾸로 뒤집어 놓고 봐도 非 둘이 하나다
김욱진 시인 / 누에씨
시를 왜 짓는가, 라는 물음에 씨는 그냥 문득 떠오른 누에처럼 시를 짓는다고 실실 얼버무리자 누에는 금세 전생으로 돌아가 알을 슬었고 뭔가를 짓는다는 좁쌀만 한 생각으로 알은 꼬물꼬물 거리기 시작했다 까막눈으로 돌가루 종이 위에 뒹굴다가 평수 넓은 신문지로 이사 와서는 뽕잎처럼 잘게 쓴 시를 다문다문 읽는 기분으로 시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행간이 생겼고, 거기에 누워 먹고 싸고 잠자면서도 온몸에 뭔가 허전한 구석이 늘 배어 있음을 절감하고부터 누에는 자나 깨나 오고 가는 길 묻고 물으며 잠잠히 시를 짓기 시작했다 한 잠을 자고 나서는 허기를 참지 못해 뽕잎에만 눈독을 들였다고 두 잠을 자고 나서는 뽕잎에 딸려온 오디 맛을 난생 처음 보았고 어딘가에 뽕나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였다고 석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허구 많은 시상이 눈앞에 아른거려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넉 잠을 자고 깨어나서는 섶처럼 얼기설기 얽힌 이 세상 나 아닌 나가 없더라고 한 줄 딱 적었다 그 순간, 누에는 오간데 없고 나는 한 마리 번데기 되어 누에가 지어놓은 집 단박에 다 부숴버리고 시 한 수 읊고 돌아가는 나 방이었다
김욱진 시인 / 수상한 시국‧3
동계 방학 자가 연수 중 코로난가 뭔가 불쑥 찾아와 현관 문고리 잡고 가는 바람에 우리 부부 자가 격리 중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먼 그러잖아도 각방거처 선언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눈칫밥 한 그릇 얻어먹고 살기도 쉽잖은 팔자인지, 눈만 뜨면 손 씻고 마스크 끼고 한 끼 먹은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각자 설거지하고 소독하고 화장실 드나들 땐 변기 거울 빚 갚듯 반질반질 다 닦아 줘야 하고 온종일 건네는 말이라고는 밥 먹자, 라는 한 마디 그마저도 눈치 보며 주고받는 일상 지금, 여기, 나는 자가 수양 중이다 자가, 누구인지 자가, 왜 여기 머물고 있는지 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 혼자 조용히 묻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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