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왕기 시인 / 시절
지나간 것은 모두 좋았던 시절, 미루나무 아래 앉아 늙고 싶은 오후다 여기 앉아보니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렇게 있다 보면 조용해지고, 지나가는 것은 모두 좋았다는 생각에 지금도 그때도 모두 좋았던 시절, 눈물 많아 좋았던 시절이라고 해본다 혼자 있길 좋아했던 어린애가 늘씬한 미루나무 아래 앉아 여물고 있다 구름이 시절을 천천히 지나간다 시절은 그렇게 지나야 한다는 듯이 천천히 지나간다
민왕기, 『아늑』, 2017년, 달아실 ,90쪽
민왕기 시인 / 풀의 미열
풀 한 잎 필때 열을 느껴 등을 짚어보니 미열이다 너는 약하구나, 너무 약하구나 약한 것은 늘 파리해 너는 초록이 되고 흔들리고 내가 슬며시 가서도 그늘지는구나 약하지 말아라, 나는 낡고 슬프지만 너는 새로 태어나도 아프지 말아라 곤한 것 건드는 바람이 오거나, 궁한 것 적시는 달빛이 오더라도 약해지지 말아라 바람의 열을 느껴, 달의 열을 느껴 선 채로 흔들리는 것은 풀뿐이다 미열로 살아서 온통 푸르른 부족들의 마을에 별을 뜨게 하고 아이들의 곁을 지켜 고마운 풀씨 하나가 하얗게 떠간다
민왕기 시인 / 시인의 멱살
거만의 멱살을 잡으려다 그만 시인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시원하게 생긴 얼굴, 이미 용서가 들어있어 단추가 떨어지고 옷이 찢긴 후 시인의 옆에 앉아서 울었다
그 밤의 일은 시의 멱살을 잡아보려던 일 화를 내고 나서야 그만 울음의 멱살을 잡힌 것처럼 외로웠다
시인의 멱살은 왜 그리 푸르고 다정한가
그 일은 당신을 거칠게도 좋아했던 일, 시를 속이고 싶었던 일
당신의 멱살을 잡으려다 그만 내 멱살을 잡고 말았다
그 밤은 시인의 옆에 앉아 울어본 밤
민왕기 시인 / 낡은 갈색 구두를 위하여
분명 나는 내 신발을 바꿔 신고 돌아간, 한 사람의 일생을 신고 걸었는데
같은 문수에 헐거운 자궁 같이 늙고 눅눅한 신발이 노새처럼 터덜터덜 나를 따라왔네
나는 그를 신고 걸었는데, 그가 나를 따라 헐떡이며 오는 새벽에
때 묻은 갈색 구두여, 사연은 모르지만 마음은 늘 이렇게도 축축한 것이었네
민왕기 시인 / 부근
해운대에 비현실적인 햇살, 어젯밤 이 부근에서 일가족이 동반 자살했다고 한다
이것까지 껴안아 보라는 듯, 일가족 중엔 여덟 살 아이가 끼어있고
민왕기 시인 / 아늑
쫓겨 온 곳은 아늑했지, 폭설 쏟아지던 밤 깜깜해서 더 절실했던 우리가 어린아이 이마 짚으며 살던 해안(海岸) 단칸방 코앞까지 밀려온 파도에 겁먹은 당신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던, 함께 있어 좋았던 그런 쓸쓸한 아늑
아늑이 당신의 늑골 어느 안쪽일 거란 생각에 이름 모를 따뜻한 나라가 아늑인 것 같고, 혹은 아득이라는 곳에서 더 멀고 깊은 곳이 아늑일 것 같은데 갑골에도 지도에도 없는 아늑이라는 지명이 꼭 있을 것 같아 도망 온 사람들 모두가 아늑에 산다는, 그런 말이 있어도 좋을 것 같았던
당신의 갈비뼈 사이로 폭폭 폭설이 내리고 눈이 쌓일수록 털실로 아늑을 짜 아이에게 입히던 그런 내밀이 전부였던 시절 당신과 내가 고요히 누워 서로의 곁을 만져보면 간간한, 간간한 온기로 사람의 속 같던 밤 물결칠 것 같았지
포구의 삭은 그물들을 만지고 돌아와 곤히 눕던 그 밤 한쪽 눈으로 흘린 눈물이 다른 쪽 눈에 잔잔히 고이던 참 따스했던 단칸방 아늑에서는 모두 따뜻한 꿈을 꾸고 우리가 서로의 아늑이 되어 아픈 줄 몰랐지 아니 아플 수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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