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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보경 시인 / 모과의, 모과에 의한, 모과를 위한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2.

하보경 시인 / 모과의, 모과에 의한, 모과를 위한

 

 

느끼니?

 

어느 별과 별에서 내게로 쉬지 않고 달려온

빛들을 살폿살폿 걷다 보면

일 년 전, 십 년 전을 견디던 기억들이

모과의 향기처럼 우리를 아련히 감싸는 순간이 온다는 거

 

그걸, 그저 유럽의 낯선 골목에서 만나 눈빛을 교환했던 검은색 줄무늬고양이라 해도 좋고

높다란 나뭇가지에 걸려서 햇살에 흔들리고 있었던 꽃 같은 노란 모자라 해도 좋아

흐르고 흐르는 강 중에 유달리 푸르게 흐르는 하나의 강을 골라 강변을 걸었지

골목과 골목이 맞닿은 곳에 다다른 하나의 골목을 단단하게 걸었어

 

까만 눈동자가 빛난다고 생각했어,

발음이 아름답게 흘러나오는 순한 입술 같았어

촛불을 들었고, 기도를 했다고 생각했어

 

평화로운 하늘을 흘러가는 새, 새의 날개

 

느끼니?

 

바람이 없이 고요한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무가 바람에 살살 흔들리네

모과가 나무마다 소원처럼 조롱 조롱 매달려

모과를 저미고, 모과를 절이는 손들

 

촛불을 든 손같이 향기로운 손

 

계간 『시와 편견』 2019년 겨울호 발표

 

 


 

하보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2014년 《시사사》로 등단. 2020년 제6회 시사사작품상을 수상. 2021년 첫시집 『쉬땅나무와 나』가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