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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주호 시인 / 겨울 자작나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2.

전주호 시인 / 겨울 자작나무

 

 

누가 발라먹은 생선 가시일까?

 

한 점 살마저도 다 떼어주고

빈 몸으로

빈 몸으로

 

묵묵히

추운 겨울 산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자작나무

 

아!

어머니

 

자작나무 옆에 다가서면

어머니 살 냄새 비릿하다

 

-전주호 시집, 슬픔과 눈 맞추다 중에서

 

 


 

 

전주호 시인 / 라일락나무 아래

 

 

붉은 벽돌 계단 옆

이제 막 배냇잠에서 깨어난 라일락나무 아래

칠순의 부부가 나물을 캐고 있다.

 

“아무거시나 다 먹는 게 아니랑께요”

“어허, 소가 먹는 건 다 먹을 수 있당께 그러시네”

 

쑥, 씀바귀, 밥주걱, 풍년초, 원추리, 광대나물

들풀을 흔들어대며

칠순의 부부는

빠진 이가 다 보이도록 마주보며 합죽 웃는다.

 

“얘야, 그만 놀고 저녁 먹으렴”

어머니가 부를 때까지

한 상 거나하게 벌어진 소꿉놀이

 

뭐든 쓸어 담을 수 있는 이순(耳順)의 나이

여린 나물들을 다듬으며

한없이 어려진 노부부를 바라보는 오후

 

킬킬킬

라일락나무 아래, 정지된 작은 행복 속으로

나도 쓰윽 끼어들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전주호 시인 / 물푸레나무

 

 

계룡산 줄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낮은 곳으로

느리게, 더 느리게 흐르는 물가를 지난다.

 

커다란 물푸레나무

가지를 살짝 기대고 있는 키 작은 물푸레나무를

뒤에서 감싸안고 서 있다.

 

두 그루 물푸레나무

멀리서도

그들, 사랑하고 있음을 알겠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찰랑찰랑 물비늘처럼 일어서는

물푸레나무의

환한 기억들이 만난다.

 

이파리

사이, 사이

 

그 환한

걷고 싶다.

 

 


 

 

전주호 시인 / 학습지 공장의 민자

 

 

고향친구 민자. 지난 겨울 서툰 자전거를 타고 야쿠르트를 배달하다가 빙판길에 넘어져 발목뼈에 금이 가 기브스를 했다는, 삐끗한 삶에 질질 끌려 함박눈이 길을 지워버린 용문동 뚝방 어디쯤 허름한 학습지 공장에 다닌다는,

 

썩어가는 다리를 치료하지 못해 대들보에 목을 매달 수밖에 없었던 상이용사 아버지를 두었던, 씨받이로 탐낸 동네 남자들 피해 야반도주하듯 서울로 이사해 하룻밤도 편히 주무시지 못한 어머니의 슬픈 노랫가락 젖은 눈빛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아리다는, 그래서 3교대 낮, 밤 시내버스 안내양 아가씨로 서울 시내를 빙빙 돌며 돈을 모아 친정집 사주었다는, 영업용 택시 운전하는 남편과 맞선으로 서른 고개 훌쩍 넘겨 결혼했다는,

 

민자, 이제 영세한 학습지 공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알콜중독 되어, 밖으로 방문 잠가놓고 출근해야 하는 시어머니, 일보다는 고스톱으로 한 탕 잡아보겠다는 남편, 빙 빙 빙 집에서 노란 주둥이 빼물고 하루종일 모이 물어오길 기다리는 새끼들 주변을 돌고 있다. 뭔가 기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더듬이를 잃어버린 일개미 같다. 엉성한 문틈으로 들어온 황소바람이 힝힝거리며 학습지를 들춰보기도 하고 난로에 올려진 주전자에서 따뜻한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도 하는 학습지 공장 안에서 그녀는,

 

늘 밀려난 삶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다. 죽을 때까지 제자리를 돌 수밖에 없는 가젤 한 마리. 식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는 고구마 냄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은 집을 갖는 것만이 소원이라는,

 

어릴 적 이웃집에 살았던, 언니들이 식모 살아 중학교까지 마치게 했던,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했던 내 친구 민자는,

 

 


 

 

전주호 시인 / 낙타의 등은 어지럽다

 

 

그대 지금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는가?

 

낙타를 타고 끝없는 사막을 걷다보면

지독한 어지럼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발이 푹푹 빠져드는 사막을 건너기 위해

낙타는 오랜 동안

독특한 걸음걸이를 계발啓發했기 때문이다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 내딛는 게

평지에서의 그대 걸음이라면

낙타는

왼쪽 뒷다리와 오른쪽 앞다리를 동시에 내딛으며

사막을 건넌다

(낙타가 빠지지 않고 모래밭 저편까지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건 이 때문)

 

하지만 낙타의 등에 탄 사람은

심한 멀미에 시달리게 된다

 

그대 앞에 끝없이 펼쳐져

일그러진 신기루를 펼쳐 보이기도 하고,

활활 타오르기도 하고

쉴 새 없이 출렁, 출렁거리는 모래바다

 

그대 지금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고 있는가?

 

낙타의 등은 멀미가 난다

 

 


 

 

전주호 시인

충남 부여에서 출생. 1999년 《심상》 신인상과 200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학습지공장의 민자〉 당선. 시집으로『슬픔과 눈 맞추다』(고요아침, 2006)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