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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성희 시인 / 니트의 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2.

배성희 시인 / 니트의 딸

 

 

발목 하나만 떨어뜨리고, 도망가는

아버지를 잡으려했다 쾅 닫힌 문틈에

손가락이 잘린 엄마, 무서워

이게 뭐야 소리 없이 울었다

딸아 세상은 눈감아 줄 거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자막으로 짜여진 불구의 니트를 벗고 싶었다

거울 앞에서 손거스러미만 물어뜯던 날, 지나고

 

이 겨울, 너를 찾아낸 곳이

어째서 길게 휘어진 터널인가

밤길만 걷자고 만난 것은 아닌데

멀리 희미한 램프 하나뿐

우리 포옹이 깊을수록 눈사람처럼 녹아

투덜거리는 너, 뜨거운 숨을 거두려하고

니트 보푸라기에 매달린 루미나리에는

날짜변경선을 어떻게 스쳐갔을까

 

풀었다 감았다 되풀이하는 손

언제쯤 녹슨 뜨개바늘을 내던질까

 

너를 외발로 보내진 않겠어

이 자리에서 끝까지 지켜보기를

내가 반대쪽으로 걸어갈 때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검붉게 풀어지는

외길이 남거든

 

 


 

 

배성희 시인 / 리듬의 발견

 

 

   비포장 낯선 길 타는 냄새가 나요 소리를 질러도 텅 빈 버스는 달려, 가속페달에 힘을 주고 놈은 퀵퀵, 튕겨나간 고슴도치들 온 방을 쏘다니고 가위눌려 볼 때마다 세 시. 아침은 멀었는데 미친 버스는 멈추지 않아 아토피 살을 긁어대지 말란 말이야

 

   퀵퀵 달아오른 놈이 몰고 오는 지진, 허리케인을 믿지 않아 부풀어 초조한 풍선들 펑, 터지고 쏟아져도 외면할 거야 반짝이 색종이 대신 무엇이 척추를 무너뜨릴지 무엇이 타오를지 난 알아, 놈은 퀵퀵 나는 슬로우

 

   얼마나 간절한가 내가 움켜쥔 것이

   놈의 손가락이기를 머리카락이기를

 

   나의 리듬을 존중한다고? 풀어지지 않으려 단단히 감긴 테이프, 슬로우 숨결을 가다듬지 나의 엔진은 달려도 과열은 없어 쇠바퀴에 채이는 돌조각처럼 놈의 속도가 유리창을 깨부순다 해도, 주먹 쥐고 앙다문 내 입술이 죽어도

 

   기억해, 우리는 계속 따로 간다는 것을

 

  팽팽한 가죽에 갇힌 맹수의 발톱 할퀴어대지만 나에겐 너무 소중한 놈 완벽하게 질긴 가면을 쓰고 매캐한 연기만 피우는 희나리 어긋나는, 리듬이야

 

 


 

 

배성희 시인 / 댄싱 하트

 

 

놀라워, 다이아몬드 스텝이

헤비메탈 리듬에 딱딱 맞다니

불빛 흐린 방에서 거울을 보며 댄스

 

암반응으로 홍채가 열리는 순간

그 눈동자는 사랑을 머금고 있을 뿐인데

갈구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댄스

 

오래 일했지만

한 푼도 못 받아 열 받습니까 댄스

 

트럭이 지나가면 부르르 떨리는 다리 위에

서서 기다리며 댄스

두 손으로 장미를 바치는 사람이 나타날 거야

 

지금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의 끝을 누가 알겠어 댄스

전갈자리 O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성격

 

어차피 모두 원래대로 될 거야

중간에 무슨 일을 겪어도

 

사랑은 내 안에 늘 존재하는 것

쉬지 않고 오므렸다 펼치는 해파리처럼

계산 없이 출몰하는 불꽃처럼 온갖 리듬에 맞춰

나 홀로 신나게 대 댄 댄스

 

 


 

배성희 시인

이화여대 생물과 졸업. 2009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서정시학, 2010)와 『타오르던 암벽에서』(푸른향기, 2016)가 있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