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극 시인 / 내 등이 너무 멀다
새벽에 잠이 깨었는데 등이 가렵다 양손을 이리저리 더듬거리니 겨우 가려운 곳에 손이 닿았다
내가 내 등을 긁는 마음으로 저녁까지 옥수수밭을 맸다
자려고 누웠는데 등이 가렵다 양손을 이리저리 휘둘러도 가려운 곳에 닿지 않는다
내 등이 너무 멀다
하루 땅이 엎드린 공력이 내 등을 긁을 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남는 장년의 저녁쯤
새벽에 깨어 가려운 등을 또 긁는다
김남극 시인 / 출근길
까마귀 대여섯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물어뜯고 있다 내장이 터져 나온 저 쓰레기봉투는 낡은 내 몸통을 닮았다 악취 나는, 더러 구멍도 난 썩은 몸을 남 앞에 내놓고는 다들 멀쩡한 몸이라고 속아 주기를 나를 분리수거라도 해주길 바라는 요즘 까마귀가 뜯어 제치는 저 쓰레기봉투 속에는 청춘도 있고 좌절도 있고 취기도 있고 울음이 덜 마른 새벽도 있었을 텐데 까마귀 같은 시절이 싱싱한 부위를 파먹어버려 소각용으로 실려 갈 몸만 남은 요즘 두려움이 산맥처럼, 그 그늘처럼 비치는 출근길
김남극 시인 / 돌배 씨
돌배는 딱 깨물어 씨방을 갈랐을 때 씨가 까맣게 두 눈을 동그랗 게 뜨고 세상을 내다보면 다 익은 것이다
그러니까 검은 눈동자가 늘 문제다
유년기를 갓 벗어난 어느 날 개울을 건너다 본 그 허벅지가 유난 히 흰 그 계집애의 눈동자가 별나게 검었다
최루탄 속에서 돌아갈 길이 아득한 눈물 속으로 내 손을 끌어주던 그 여자의 눈동자도 별나게 검은 빛이었다
지금 내 옆에 반듯하게 조용히 잠든 아내가 하늘거리는 짧은 치마 속으로 내 마음을 끌고 들어갔을 때 어둠 속에서 본 그 유난히 검은 눈동자
검은 빛은 완숙의 경지고 매혹의 경지고 그래서 그 속에 들면 자발 적 수형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늘 가득 매달린 돌배들이 어설픈 푸른빛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돌배를 하나 따서 딱 깨물어본다
씨가 검다 물기가 남았다
씨는 씨방 속에서 참 많이 울었나보다
울음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나는 이 마가리*를 떠날 수 없다
*마가리: 영동 방언, 골짜기의 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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