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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인갑 시인 / 황혼창고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8.
<애지> 신인문학상 당선작품김인갑 시인 / 황혼창고   대체로 호로자식이었다 동네 버려진 창고마다 바지 안쪽에 식칼을 넣은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사내들을 만나러 온 동네 계집들은 식칼에 잘린 손가락 피를 빨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손가락이 없어 팔목을 잘린 아랫마을 끝순이, 사내를 만나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뭉툭한 손목을 꼬아 황혼을 안고 사라졌다 비 오는 밤이면 알전구 아래 둘러앉은 계집들이 솜이불 위에 잘린 손가락을 던지면서 낄낄 댔다 밖으로 새나간 웃음소리가 동네 사람들 귀에 들리기라도 하는 밤이면 사람들은 계집들의 윷놀이가 한창이라 여겼다 계집들은 손가락 피가 마른 순으로 오공본드를 발라주었다  십 년에 한번 꼴로 호로 자식 중 하나가 마을에 나타나곤 했다 그런 밤이면, 골목 어수룩한 벽마다 계집들의 혈흔이 담쟁이넝쿨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손가락 없는 계집들의 손이 벽을 잡으려 애썼다 개 눈알을 낀 채, 황혼과 죽음만을 기억하는 가로등은 사내의 바지에서 탈옥한 식칼을 막지 못했다 식칼은 피맛을 되찾은 듯 빛을 냈다  창고에 남은 사내들이 던진 식칼 주위로 둘러앉아 낄낄대지만 죽음을 앞두고 나누는 담론은 날카로웠다 사내들은 식칼더미 앞에서 맹세했다 이곳에서 나갈 때 그 동안 자른 계집들 손가락 개수만큼 황혼을 짊어지고 나가기로 했다 숫자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에 황혼을.  
  김인갑 시인 / 베르쿠치의 겨울  한겨울,울란바토르 행 유베트촌에 도착,카자흐족의 겨울을 따라 나섰네 눈 덮인 험준한 산등성이족장 바이텔의 눈에설원을 가로지르는 여우가 들어오네 젊은 베르쿠치*들 팔뚝에서독수리들이 날아올라도망치는 여우목덜미를 낚아채 몇 바퀴 구르네발톱으로 비명을 짓누르고힘 풀린 허벅살을 쪼고 물어뜯네알타이아 겨울도 베르쿠치들에게 그러했네 발목 묶인 까마귀를 낚아채다그물에 걸린 독수리로여우를 사냥하는 카자흐족 유르트* 안, 일곱 살 사내아이 어깨에독수리 한 마리가 얹혀진다이제 아이도 베르쿠치라는 바이텔의 말에궁지에 몰린 늑대가 되어말에 탄 사람에게 달려들고 싶은 밤 눈 내린 겨울의 먼 발자국을 따라낙타 등에 원정을 싣는 카자흐족여우모피 가죽을 입고독수리를 날려보내는 날바이텔도 언젠가자연의 팔뚝에서 날아올라겨울과 공생하는 법을 낚아챌 것이네 알타이아에서 보낸 일주일,극한의 바람과 호흡하는야크의 습성을 익혔네인적 드문 이국땅비탈길에 쌓인 눈밭을 다시 찾아야겠네깊은 겨울이 찍어 놓고 간생존의 흔적을 따라한 백년쯤 헤매어야겠네 *베르쿠치 - 독수리를 이용해서 여우나 늑대를 사냥하는 사람.*유르트 - 나무기둥에 거적을 둘러싼 유목민의 이동식 주택.  
  김인갑 시인 / 간격  바다에 살면서몸집이 크다 하여 지어진 이름바다코끼리,그에게는 누구보다 가지런한 이빨이 두개 있다 지붕 아래 열린아이들 것의 고드름이나밤을 쓸고 담는 환경미화원이차에 매달린 모습이나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간 남자가흔들어 댈 것 같은 철창이 그에게는 있다 그 희디흰 이빨을 보면서 나는사람사이에도 저만큼에간격이 있음을 안다부딪히지 않고 맞물리지 않지만때때로 힘을 합쳐 공복을 채우는 일,남남처럼 지내다 위협을 느끼면한 가지 무기로 변하는 그의 이빨, 탐스런 그의 이빨을 자꾸 보다 보면죽음을 앞둔 사람과산 사람의 간격도그리,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김인갑 시인 / 닭  날고 싶다 새벽닭이 대낮에 우는 건아마 날아야 한다는 생각이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한 여름 밤,날지 못하는 팔로그래도 나는 척 이라도 하자고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친다날듯 말듯 땅에 떨어지는 배드민턴공,살다보면착지가 곧 추락인 것들도 있다 격렬하게 배드민턴을 치고 나면내 손에 닭의 주검 냄새가 베어나 있다아직 새벽이 오지도 않았는데닭이 우는 건푸드득,또 날고 싶은 마음이새벽보다 먼저 찾아오기 때문이다 배드민턴공이 오래 날지 못하는 건닭털로 만든 배드민턴공을 향해 사람들이죽을힘을 다해 쫓아가지 않기 때문어둠과 아침의 간격이닭의 울음소리보다 짧기 때문이다 닭이 새벽녘에 불현듯서럽게 우는 것은날고 싶은 마음만 훌쩍,어디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김인갑 시인 / 하늘 운동회  전봇대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전깃줄 사이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뒤꿈치로 금 밟은 구름을 못 본 척, 바람이 심판을 보고 있다 기차가 지나가면 전봇대 줄에 앉은 새들이 파도처럼 날아간다 한쪽에서 전깃줄의 그림자로 줄넘기하는 아파트, 구름을 제치고 옆집 참새와 제비가 공동 1등으로 도착 끈을 끊고 날아가는 그 아래, 아이가 문간방의 공간을 활보하고 있다 골목마다 소란스러움 들이재재배배 재재배배 베어나는 봄날하늘 운동장은 환호성들로 가득한데아이는 빈방에 담겨키가 닿지 않는 선반 위 운동화만 바라보고 있다 맨 마지막 주자인 해와 달의계주가 끝나도록운동회간 꼬까참새가 놀러오도록 달동네 기울어진 문간방 안,선반 위 놓인 운동화에눈을 떼지 못하는 그 아이 그 아이를 생각하는 밤이면,새도 구름도 보이지 않는 그런 밤이면현수막 그림자와 나는오랫동안 줄넘기를 하곤 했다선반에 손이 닿을 만큼자란 그 아이를 생각하는 밤이면… 




김인갑 시인1987년 전남 장성 출생,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3년 《애지》 겨울호 신인상 당선. 제 23회 순천대학교 학술문학상 시 당선, 제 28회 황룡 학술문학상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