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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극 시인 / 내 등이 너무 멀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8.

김남극 시인 / 내 등이 너무 멀다

 

 

새벽에 잠이 깨었는데 등이 가렵다

양손을 이리저리 더듬거리니 겨우 가려운 곳에 손이 닿았다

 

내가 내 등을 긁는 마음으로

저녁까지 옥수수밭을 맸다

 

자려고 누웠는데 등이 가렵다

양손을 이리저리 휘둘러도 가려운 곳에 닿지 않는다

 

내 등이 너무 멀다

 

하루 땅이 엎드린 공력이

내 등을 긁을 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남는

장년의 저녁쯤

 

새벽에 깨어 가려운 등을 또 긁는다

 

 


 

 

김남극 시인 / 출근길

 

 

까마귀 대여섯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물어뜯고 있다

내장이 터져 나온 저 쓰레기봉투는 낡은 내 몸통을 닮았다

악취 나는, 더러 구멍도 난 썩은 몸을 남 앞에 내놓고는

다들 멀쩡한 몸이라고 속아 주기를

나를 분리수거라도 해주길 바라는 요즘

까마귀가 뜯어 제치는 저 쓰레기봉투 속에는

청춘도 있고 좌절도 있고 취기도 있고

울음이 덜 마른 새벽도 있었을 텐데

까마귀 같은 시절이 싱싱한 부위를 파먹어버려

소각용으로 실려 갈 몸만 남은 요즘

두려움이 산맥처럼, 그 그늘처럼 비치는 출근길

 

 


 

 

김남극 시인 / 돌배 씨

 

 

돌배는 딱 깨물어 씨방을 갈랐을 때 씨가 까맣게 두 눈을 동그랗

게 뜨고 세상을 내다보면 다 익은 것이다

 

그러니까 검은 눈동자가 늘 문제다

 

유년기를 갓 벗어난 어느 날 개울을 건너다 본 그 허벅지가 유난

히 흰 그 계집애의 눈동자가 별나게 검었다

 

최루탄 속에서 돌아갈 길이 아득한 눈물 속으로 내 손을 끌어주던

그 여자의 눈동자도 별나게 검은 빛이었다

 

지금 내 옆에 반듯하게 조용히 잠든 아내가 하늘거리는 짧은 치마

속으로 내 마음을 끌고 들어갔을 때 어둠 속에서 본 그 유난히 검은 눈동자

 

검은 빛은 완숙의 경지고 매혹의 경지고 그래서 그 속에 들면 자발

적 수형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늘 가득 매달린 돌배들이 어설픈 푸른빛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돌배를 하나 따서 딱 깨물어본다

 

씨가 검다

물기가 남았다

 

씨는 씨방 속에서 참 많이 울었나보다

 

울음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나는 이 마가리*를 떠날 수 없다

 

*마가리: 영동 방언, 골짜기의 맨 끝

 

 


 

김남극 시인

1968년 강원도 평창 봉평에서 태어남.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2003년 《유심》신인문학상 수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문학동네, 2008), 『너무 멀리 왔다』가 있음. 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