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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수현 시인 / 개밥바라기와 눈 맞추기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7.

신수현 시인 / 개밥바라기와 눈 맞추기

 

 

저녁달 따라 오르는 개밥바라기와

눈 맞춘 건 언제지

양 떼와, 갈기 휘날리는 사자와

얼룩말을 몰고 다니던 뭉게구름……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대청에 누웠다가 큰 손에 들려

별하늘에 빠졌던 밤까지 총총총 떠오르네

둥둥 내 몸을 안고 흐르던 은하수

세상엔 빛나는 것들이 별보다 많을 텐데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큼일까

아버지도, 엄마도, 도토리 같은 두 동생도

날 업어 기른 복순 언니도

파초 잎 하늘거리는 자배기가 있는 마당도

네로와 파트라슈가 잠들었던 앤트워프의 성당도

다 사라지겠지

아버지가 안아다 눕힌 잠자리

풀지 못한 갈래머리 밤새 젖어

뻣뻣해진 솜사탕 같은 슬픔과의 첫 만남도

별빛 사라진 서울 하늘만큼 멀어졌는데,

컴퓨터 앞에 앉으면

세렝게티의 무지개*, 랑탕 히말라야 하늘섬이 보인다*

이런 사진들이 눈에 띄면

퍼다가 내 창에 깔아 놓기도 하고

허블 망원경이 없이도

별을 찾는 사람들의 카페에서

은하철도 999를 타기도 했는데

들여다볼수록 더욱 멀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자꾸 몸이 무거워 가는 나를

이제 데리고 나가야 할까봐

알라딘의 램프 거인, 그 여름밤처럼

나 좀 번쩍 올려 줘

이름을 몰라도 눈 맞춰 놀던 그 별들 곁으로

 

 


 

 

신수현 시인 / 꽃무릇에 찍히다

 

 

여름 끝 무렵 호남선 타고 광주에 갔었네 환벽당 앞뜰에서 리콜리스 혹은 상사화라 불린다는 꽃무릇 난생처음 보았네 받쳐주는 이파리 눈 씻고 보아도 없이 꽃잎만 타오르고 있었네 그 꽃무릇 군락에서 카메라에 몇 장 찍혔을 뿐인데, 한 사람과 한 지붕 밑에서 뒹굴고 부대낄 수 없던 내 전생이 고스란히 인화지에 배어나와 서울로 돌아왔네 서로 다른 방에서 밥숟가락 들다가 이쁜 옷 입다가 잡자리에서 뒤척디아가, 문득

 

잡을 곳 없는 줄기 위에

결코 외로워 보이고 싶지 않은

둥근 알뿌리마다

사랑을 벗어두고 온 내가

 

갉아대고 떼어먹고 천방지축 발 굴러도 끄떡없는 품 안에서 자꾸 투정 부리지 말라고 다음 생에서도 돌아오지 말라고 간절한 눈빛으로 내가

 

잎 기다리고 있네

 

 


 

 

신수현 시인 / 노숙

 

 

칠사칠 엠비 공약이 날지도 못하고

몸 누일 수 있는 곳, 어디나 그렇듯이

창덕궁 담 너머 공원에도

이슬 내리는 잠자리가 있었다

저녁 후에 산책 나와

두런거리는 중년의 부부에게도

무릎을 내어 머리를 벤 젊은 연인들에게도

벽이라도 둘러놓은 듯

가로등 불빛 못 미치는 한구석이 있었다

찢어진 신문지 위

은박돗자리 빛바랜 밍크담요

덮여 있는 나무 벤치

소주 한 병 들고 돌아 들어온

마흔 남짓의 몸피도 작은 사내가 있었다

다리 드밀고 앉아 병나발 한 곡 불고

담요로 발끝부터 여며

얼굴까지 덮어 버리면

순간

나무들이 염(殮)을 마친 관을 조문하듯

내려다보는

여름밤이 있었다

 

밤이슬 막을 지붕이 있는 식구들과

밥상을 마주하던

옷을 벗고 누울 수 있던

아흔아홉 칸

궁궐 부럽지 않던

집 한 칸, 어디엔가 기다리고 있는지

꿈에서라도 찾아가는지

그 사내 문득 문득

 

 


 

 

신수현 시인 / 밥

 

 

잊히지 않는 것은

시간으론 헤아릴 수 없는 것

 

더 큰 질량의 만남을 믿었네

뼈도 살도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어둠 속의 목소리가 가끔

익어 가는 내 가슴에

물거품을 퍼붓기도 했지만

이미 내 비루한 마음에 일용할 양식이 된

그대 모습 일어나 다시 끓기 시작했네

처음부터 온전한 것은 없었네

무작정 무릎 꿇고 엎드려

물과 불의 길을 건너는 것이네

뿌리부터 가지까지 설익은 말

숨죽여 그대 향하네

뜸 들여지고 싶은 것이네

 

 


 

 

신수현 시인 / 눈

 

 

항상 생각해요

이마에, 뺨 위에 살짝 입 맞추고 갈까요

탱, 쥐었다 풀었다 눈치 보게 할까요

 

흐르다가 자꾸 당신을 만납니다

이름 한번 얻지 못했어도 알 수 있습니다

숲이었던

바위였던

당신 안에 출렁이며 머물렀지요 머문다는 것

발목 묻고 익어 가는 일입니다

몸 바꾸어

그 몸의

흐뭇한 살이 되는 일입니다

통통 살 오르는 날들을 지나

흩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 덧없는 것만은 아니지요

스러지는 만남도 이렇듯 쌓이다 보면

당신에게 한번은 전부가 되고 싶습니다

만년설은 못 되더라도

 

 


 

 

신수현 시인 / 파도

 

 

그가 없다

나를 물밀듯이 휘젓다가

또 사라졌다 그가 없으니

사방 햇볕 속에서

마음이 온종일 그늘이다

햇살 한 줌 담아 본다

빈자리에 펼쳐 놓는다

희디흰 모래밭이다

조용히 그를 불러 본다

음성도 문자 메시지도 닿지 않는 섬

이윽고 그가 온다

올 듯 말 듯 오래 달려온다

나는 미리 차올라

쓰러진다 그가

어깨를 내주고 팔을 둘러 준다

남은 숨들 이제야 깊어진다

발자국 다져진 길 위에

다시 발자국을 남기는

반복이 아니면서 반복이듯이

 

 


 

 

신수현 시인 / 구름 경전

 

 

사랑하는 것

서로 꺾이는 것

한 잎 풀 말라 가는 만큼 견디는 것

두근거림 폭폭 스미기도 하는 것

푸른 이마 때로 살아나기도 하는 것

 

가지런히 발 뻗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

가벼움으로 곧잘 뒤척이는 것

그러다가 벼랑을 만들기도 하는 것

떨어져 흘러가기도 하는 것

 

정좌한 내 사랑은 아직도 날것

그 풋풋함으로 뿌리내리는 중

 

 


 

 

신수현 시인 / 떠나감에 대하여

 

 

휘모리장단의 봄 햇살 속 매화 개나리 목련 진달래 튼살을 비집고 나와 방글거리는 웃음, 떠나는 몸짓도 가지가지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 어미 품에서 날아간다 오리나무 연둣빛 떡잎 사이로 넘나드는 굴뚝새도 이소(離巢)의 두려움을 치러낸 것

 

옹알거리며 새로 맺히는 이파리들 날아갈 차비하는 꽃잎들 올려다보며……떠나왔던 아버지 떠나간 아버지, 해 갈수록 오히려 말캉해져 불현듯 터지는 자국들 잠시 또 아리는 가슴

 

숨 고르던 바람이 다시 나는지 이제 막 부들잎 돋는 물결 위로 분분 꽃잎들 동동 어리어 다시 흘러간다

 

 


 

신수현 시인

1999년 시 전문지《현대시학》으로 등단. 2000년《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으로『개밥 바라기와 눈 맞추기』(실천문학사, 201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