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현 시인 / 개밥바라기와 눈 맞추기
저녁달 따라 오르는 개밥바라기와 눈 맞춘 건 언제지 양 떼와, 갈기 휘날리는 사자와 얼룩말을 몰고 다니던 뭉게구름……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대청에 누웠다가 큰 손에 들려 별하늘에 빠졌던 밤까지 총총총 떠오르네 둥둥 내 몸을 안고 흐르던 은하수 세상엔 빛나는 것들이 별보다 많을 텐데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큼일까 아버지도, 엄마도, 도토리 같은 두 동생도 날 업어 기른 복순 언니도 파초 잎 하늘거리는 자배기가 있는 마당도 네로와 파트라슈가 잠들었던 앤트워프의 성당도 다 사라지겠지 아버지가 안아다 눕힌 잠자리 풀지 못한 갈래머리 밤새 젖어 뻣뻣해진 솜사탕 같은 슬픔과의 첫 만남도 별빛 사라진 서울 하늘만큼 멀어졌는데, 컴퓨터 앞에 앉으면 세렝게티의 무지개*, 랑탕 히말라야 하늘섬이 보인다* 이런 사진들이 눈에 띄면 퍼다가 내 창에 깔아 놓기도 하고 허블 망원경이 없이도 별을 찾는 사람들의 카페에서 은하철도 999를 타기도 했는데 들여다볼수록 더욱 멀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자꾸 몸이 무거워 가는 나를 이제 데리고 나가야 할까봐 알라딘의 램프 거인, 그 여름밤처럼 나 좀 번쩍 올려 줘 이름을 몰라도 눈 맞춰 놀던 그 별들 곁으로
신수현 시인 / 꽃무릇에 찍히다
여름 끝 무렵 호남선 타고 광주에 갔었네 환벽당 앞뜰에서 리콜리스 혹은 상사화라 불린다는 꽃무릇 난생처음 보았네 받쳐주는 이파리 눈 씻고 보아도 없이 꽃잎만 타오르고 있었네 그 꽃무릇 군락에서 카메라에 몇 장 찍혔을 뿐인데, 한 사람과 한 지붕 밑에서 뒹굴고 부대낄 수 없던 내 전생이 고스란히 인화지에 배어나와 서울로 돌아왔네 서로 다른 방에서 밥숟가락 들다가 이쁜 옷 입다가 잡자리에서 뒤척디아가, 문득
잡을 곳 없는 줄기 위에 결코 외로워 보이고 싶지 않은 둥근 알뿌리마다 사랑을 벗어두고 온 내가
갉아대고 떼어먹고 천방지축 발 굴러도 끄떡없는 품 안에서 자꾸 투정 부리지 말라고 다음 생에서도 돌아오지 말라고 간절한 눈빛으로 내가
꽃 잎 기다리고 있네
신수현 시인 / 노숙
칠사칠 엠비 공약이 날지도 못하고 몸 누일 수 있는 곳, 어디나 그렇듯이 창덕궁 담 너머 공원에도 이슬 내리는 잠자리가 있었다 저녁 후에 산책 나와 두런거리는 중년의 부부에게도 무릎을 내어 머리를 벤 젊은 연인들에게도 벽이라도 둘러놓은 듯 가로등 불빛 못 미치는 한구석이 있었다 찢어진 신문지 위 은박돗자리 빛바랜 밍크담요 덮여 있는 나무 벤치 소주 한 병 들고 돌아 들어온 마흔 남짓의 몸피도 작은 사내가 있었다 다리 드밀고 앉아 병나발 한 곡 불고 담요로 발끝부터 여며 얼굴까지 덮어 버리면 순간 나무들이 염(殮)을 마친 관을 조문하듯 내려다보는 여름밤이 있었다
밤이슬 막을 지붕이 있는 식구들과 밥상을 마주하던 옷을 벗고 누울 수 있던 아흔아홉 칸 궁궐 부럽지 않던 집 한 칸, 어디엔가 기다리고 있는지 꿈에서라도 찾아가는지 그 사내 문득 문득
신수현 시인 / 밥
잊히지 않는 것은 시간으론 헤아릴 수 없는 것
더 큰 질량의 만남을 믿었네 뼈도 살도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어둠 속의 목소리가 가끔 익어 가는 내 가슴에 물거품을 퍼붓기도 했지만 이미 내 비루한 마음에 일용할 양식이 된 그대 모습 일어나 다시 끓기 시작했네 처음부터 온전한 것은 없었네 무작정 무릎 꿇고 엎드려 물과 불의 길을 건너는 것이네 뿌리부터 가지까지 설익은 말 숨죽여 그대 향하네 뜸 들여지고 싶은 것이네
신수현 시인 / 눈
항상 생각해요 이마에, 뺨 위에 살짝 입 맞추고 갈까요 탱, 쥐었다 풀었다 눈치 보게 할까요
흐르다가 자꾸 당신을 만납니다 이름 한번 얻지 못했어도 알 수 있습니다 숲이었던 바위였던 당신 안에 출렁이며 머물렀지요 머문다는 것 발목 묻고 익어 가는 일입니다 몸 바꾸어 그 몸의 흐뭇한 살이 되는 일입니다 통통 살 오르는 날들을 지나 흩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 덧없는 것만은 아니지요 스러지는 만남도 이렇듯 쌓이다 보면 당신에게 한번은 전부가 되고 싶습니다 만년설은 못 되더라도
신수현 시인 / 파도
그가 없다 나를 물밀듯이 휘젓다가 또 사라졌다 그가 없으니 사방 햇볕 속에서 마음이 온종일 그늘이다 햇살 한 줌 담아 본다 빈자리에 펼쳐 놓는다 희디흰 모래밭이다 조용히 그를 불러 본다 음성도 문자 메시지도 닿지 않는 섬 이윽고 그가 온다 올 듯 말 듯 오래 달려온다 나는 미리 차올라 쓰러진다 그가 어깨를 내주고 팔을 둘러 준다 남은 숨들 이제야 깊어진다 발자국 다져진 길 위에 다시 발자국을 남기는 반복이 아니면서 반복이듯이
신수현 시인 / 구름 경전
사랑하는 것 서로 꺾이는 것 한 잎 풀 말라 가는 만큼 견디는 것 두근거림 폭폭 스미기도 하는 것 푸른 이마 때로 살아나기도 하는 것
가지런히 발 뻗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 가벼움으로 곧잘 뒤척이는 것 그러다가 벼랑을 만들기도 하는 것 떨어져 흘러가기도 하는 것
정좌한 내 사랑은 아직도 날것 그 풋풋함으로 뿌리내리는 중
신수현 시인 / 떠나감에 대하여
휘모리장단의 봄 햇살 속 매화 개나리 목련 진달래 튼살을 비집고 나와 방글거리는 웃음, 떠나는 몸짓도 가지가지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 어미 품에서 날아간다 오리나무 연둣빛 떡잎 사이로 넘나드는 굴뚝새도 이소(離巢)의 두려움을 치러낸 것
옹알거리며 새로 맺히는 이파리들 날아갈 차비하는 꽃잎들 올려다보며……떠나왔던 아버지 떠나간 아버지, 해 갈수록 오히려 말캉해져 불현듯 터지는 자국들 잠시 또 아리는 가슴
숨 고르던 바람이 다시 나는지 이제 막 부들잎 돋는 물결 위로 분분 꽃잎들 동동 어리어 다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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