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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겸 시인 / 악보 위를 걷는 고양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7.

정겸 시인 / 악보 위를 걷는 고양이

 

 

카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도심으로 손돌바람 몰아치자

전선줄은 일제히 발정 난 암고양이 울음 토해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누군가를 흘긋흘긋 훔쳐보며

좀비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있는 베스트실버요양병원

고양이 한 마리 음식물 쓰레기통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가시 덮인 청미래넝쿨 숲을 뚫고

흙먼지 날리는 황토길 달려 왔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짙은 어둠을 밀어 내고 빛을 모았다

 

크로노스가 작곡했다는 쉼표도 없는 악보 속에서

난이도가 높은 음계 따라 파도를 타며 살아 왔다

아다지오와 안단테가 표시되지 않은 악보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를 찾아 거친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삶을 끌고 가던 주파수가 끊겼다 이어지고 다시 끊긴다

희미해지는 전파채널을 잡으려 양쪽 귀와 꼬리를 곧추 세워본다

음파가 멈춘 난청지대에서 안테나를 조절하며

주파수를 찾고 있지만 이제는 잡음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다

무뎌진 발톱 보듬고 허공 향해 앞발 치켜들며 휘젓는 늙은 고양이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비틀거리며 걷는다.

 

길 옆, 폐휴지 가득 실은 낡은 리어카 가로수에 몸 지탱하고 있다.

 

격월간『현대시학』 2021년 3~4월 발표

 

 


 

 

정겸 시인 / 파라다이스 클럽

 

 

푸른 숲 정신 요양병원은 언제나 싱싱한 미나리로 가득하다

 

아저씨 코로나불루가 뭔지 아세요

그 병에 걸리면 평생을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춰야 하지요

저기 보이는 붕어빵집 아저씨도 호떡집 아줌마도 꽃집 아가씨도

서로 서로 손을 잡고 붕어빵이 익을 때까지

호떡에서 꿀물이 나올 때까지 꽃봉오리가 활짝 필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빙글빙글 얼싸 안고 춤을 추는 겁니다

 

머리 깎은 환자가 링거 병에 매달려 간다검정색 중절모를 쓴 신사가 병동 안내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분홍색 환자복을 입은 여인이 히죽거리며 다가와 속삭인다

블루스 한번 당길까요 자, 이렇게 치는 겁니다

 

지구가 해를 따라 돌고 달이 지구를 따라 돌고

별이 우주를 따라 돌 듯, 같은 방향으로 돌면 되는 거예요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숫자도 다섯까지 셀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는 많은 숫자는 짐이 된답니다

 

앗, 아저씨 아줌마 반대로 돌지 마세요 과속하지 마세요

끼~익, 큰일 날 뻔 했잖아요

자, 지금부터 슬로우 킥 슬로우 킥.

 

계간『시현실』 2021년 봄호 발표

 

 


 

정겸 시인

2003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경희대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시집으로 『푸른경전』,『공무원』 『궁평항』이 있음. 경기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