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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상운 시인 / 가족(家族)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7.

심상운 시인 / 가족(家族)

 

 

우리들 가족의 넝쿨은 푸르고 무겁다

무수한 줄기와 잎사귀와

땅 밑에 감추어진 혈통의 굵은 뿌리

 

집안에는 질박한 옛 가구(家具)처럼

어른들의 그림자 은은히 드리워져

더욱 신선한 이이들의 목소리

 

아이들은 어두운 광속에 들어가 녹슨 농기구를 만지며

조부(租父)들이 몰두하던 오래된 꿈을 찾아내기도 하고

조모(租母)의 눈물과 믿음이 짜낸 따스한 그늘에 싸여

여름 열매처럼 두 눈을 반짝인다

 

어느 날 가족의 문을 열고 나가

춘하추동(春夏秋冬) 새 바람이 되어 들어오는 아이들

그들의 꿈은 창호지 문살 마다 푸르게 묻어

다시 집안에 싱싱한 덩굴이 되고 가지가 되고

 

우리들 가족의 덩굴 마디마디엔

해마다 새로 눈 뜨는 꽃망울들

 

 


 

 

심상운 시인 / 눈 내리는 날의 통화

 

 

밤새 눈이 내린 날

창밖 하얀 빛에 가슴 설레는 날

 

<아, 여보세요>

 

수화기受話器에서 막 울릴 듯한

그의 목소리

 

이런 날 나는

천상天上의 그와 통화가 잘 될 것만 같아

구식舊式 전화기의 다이알을 계속 돌린다

 

나뭇가지의 눈들이

제각기 반짝이기 시작하는

오전 11시

 

 


 

 

심상운 시인 / 고향산천·12

-싸리꽃

 

 

이른 여름

강원도 산비탈엔

살내음 환한 싸리꽃

 

스물 두 살의 나는

소총小銃을 버리고

한 아름 싸리꽃과 함께

땅바닥에 누웠다.

 

여름은 온통

치마폭 가득

푸른 불길

 

나는 방금 불속에서

새로 태어난

청록색 풀잎이었다.

 

 


 

 

심상운 시인 / 고향산천·18

- 어느 소년병의 잠

 

 

그는 이제 눈 감고

풀잎에 내리는 흰 눈을 보고 있다.

새소리도 마침내

맑은 이슬로 내리고

질경이 뿌리에 닿는 볕이

손등의 눈을 녹이고 있다.

 

<밝음과 어둠의 문지방 사이에

걸쳐 있는 그의 발목>

 

어느 날 그는 소총 멜방에 끌려

청솔 돋는 마을을

떠나갔을 뿐

죽은 것 같지 않다.

 

눈감고 편안히 누워

산천의 흰 눈 맞으며

언 땅 밑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소년병의 잠

 

 


 

 

심상운 시인 /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 숲

- 신神들의 마을

 

 

아직 개발開發되지 않은

컴컴하고 습한 지역을 아시나요

 

눈 내리는 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

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인가人家와는 멀리 떨어져

마을의 길은 이미 끊어지고

컴컴하고 습한 진흙 벌만 계속되는

미개발의 그 곳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면

자연의 거대한 사원寺院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

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

젊은 신神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

 

 


 

심상운 시인

1943년 강원도 춘천 출생.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4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고향산천』, 『당신 또는 파란 풀잎』, 『녹색 전율』 등과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가 있음. 사단법인 한국 현대 시인협회 회장 역임, 제20회 시문학상 수상. 제11회 정문문학상 수상. 전 중등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