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운 시인 / 가족(家族)
우리들 가족의 넝쿨은 푸르고 무겁다 무수한 줄기와 잎사귀와 땅 밑에 감추어진 혈통의 굵은 뿌리
집안에는 질박한 옛 가구(家具)처럼 어른들의 그림자 은은히 드리워져 더욱 신선한 이이들의 목소리
아이들은 어두운 광속에 들어가 녹슨 농기구를 만지며 조부(租父)들이 몰두하던 오래된 꿈을 찾아내기도 하고 조모(租母)의 눈물과 믿음이 짜낸 따스한 그늘에 싸여 여름 열매처럼 두 눈을 반짝인다
어느 날 가족의 문을 열고 나가 춘하추동(春夏秋冬) 새 바람이 되어 들어오는 아이들 그들의 꿈은 창호지 문살 마다 푸르게 묻어 다시 집안에 싱싱한 덩굴이 되고 가지가 되고
우리들 가족의 덩굴 마디마디엔 해마다 새로 눈 뜨는 꽃망울들
심상운 시인 / 눈 내리는 날의 통화
밤새 눈이 내린 날 창밖 하얀 빛에 가슴 설레는 날
<아, 여보세요>
수화기受話器에서 막 울릴 듯한 그의 목소리
이런 날 나는 천상天上의 그와 통화가 잘 될 것만 같아 구식舊式 전화기의 다이알을 계속 돌린다
나뭇가지의 눈들이 제각기 반짝이기 시작하는 오전 11시
심상운 시인 / 고향산천·12 -싸리꽃
이른 여름 강원도 산비탈엔 살내음 환한 싸리꽃
스물 두 살의 나는 소총小銃을 버리고 한 아름 싸리꽃과 함께 땅바닥에 누웠다.
여름은 온통 치마폭 가득 푸른 불길
나는 방금 불속에서 새로 태어난 청록색 풀잎이었다.
심상운 시인 / 고향산천·18 - 어느 소년병의 잠
그는 이제 눈 감고 풀잎에 내리는 흰 눈을 보고 있다. 새소리도 마침내 맑은 이슬로 내리고 질경이 뿌리에 닿는 볕이 손등의 눈을 녹이고 있다.
<밝음과 어둠의 문지방 사이에 걸쳐 있는 그의 발목>
어느 날 그는 소총 멜방에 끌려 청솔 돋는 마을을 떠나갔을 뿐 죽은 것 같지 않다.
눈감고 편안히 누워 산천의 흰 눈 맞으며 언 땅 밑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소년병의 잠
심상운 시인 /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 숲 - 신神들의 마을
아직 개발開發되지 않은 컴컴하고 습한 지역을 아시나요
눈 내리는 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 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인가人家와는 멀리 떨어져 마을의 길은 이미 끊어지고 컴컴하고 습한 진흙 벌만 계속되는 미개발의 그 곳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면 자연의 거대한 사원寺院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 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 젊은 신神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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