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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선욱 시인 / 고등어야 미안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7.

박선욱 시인 / 고등어야 미안해

 

 

모처럼 우리 집 식탁에 오른 고등어

넓은 접시에 오른 고등어구이

잘 익은 생선살 막 발라먹으려 할 때

식탁 한 귀퉁이에 펼쳐진 신문 헤드라인이

불쑥 눈에 들어왔다

"고등어, 미세먼지 주범

고등어를 구울 때 창문을 활짝 열고

환풍에 유의하라"*

커다랗게 들어온 환경부의 경고문

우리만큼 다른 사람들도

놀란 가슴 쓸어내렸을 것이다

미세먼지 자욱한 서울

북경만큼 캄캄해질 때

정부는 슬그머니 고등어에 화살을 돌렸다

느닷없이 미세먼지 주범으로 둔갑한 고등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자

환경부는 2주 만에 발표를 번복했다

가까스로 혐의를 벗은 고등어

눈이 커서 기름눈까플**이 잘 발달된,

둥근 접시 위에 누워

큰 눈 껌뻑거리는 듯한

영문도 모르고 과녁이 된 생선

고등어야

괜시리 내가 너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해지는구나

 

* 2016년 5월 23일 환경부는 "실내 미세먼지를 조사한 결과 집 안에서 고등어를 구우면 미세먼지 나쁜 날의 30배 이상 농도의 미세먼지가나온다"고 발표한 바 있다.

** 정어리, 고등어, 숭어의 눈에 발달하는 투명한 막.

 

 


 

 

박선욱 시인 / 강원도 정선 느른국

 

 

강원도 정선 아라리촌에서 만난 이것은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함께 먹어야 제맛이다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북적이는 소리,

흥겨운 음악소리와 어울려 먹는 맛이라야 으뜸이다

따뜻한 물에 메밀가루와 참밀가루를 섞고

소금물 부어가며 치대어 찰기가 생기게 한 이것은

여럿이 함께 나눠 먹기 위해 반죽을 눌러 만든다는

강원도 정선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으로 빚은

끓는 육수에 집된장을 풀어놓고

감자옹심이 넣어 둥둥 뜨게 한 느른국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정선아리랑 한 자락과 함께 먹으면 더욱 정겨운 느른국은

가슴 한쪽이 베어지는 순간에도

후루룩 먹는 상대의 눈길에서 웬지 모를 푸근함 느끼게 되고

반복되는 후렴과 더불어 옹심이 우물거리다 보면

발장단도 치고 어깨춤도 들썩이게 된다

 

느른국 먹는 날이면

먼 옛날 호랑이 같은 양반 등쌀에 시달리다

허위허위 쫒기다 시피 들어온 화전민들

송도 두문동에서 정선으로 옮겨와

평생 산나물 뜯어먹던 고려 유신들

그들이 머물던 곳 어디메인가

뜨거운 국물 후후 불며 가늠도 해본다

병풍처럼 두른 높은 산,

구름도 쉬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쯤

햇볕 잘 드는 양지바른 터에 자리 잡은

잡목숲 베어낸 뒤

불 피우고 마른 땅 갈아 엎노라면

아라리 한 대목 저절로 목울대 타 넘지 않았을까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머릿수건 질끈 동여매고 땀방울로 일군 메밀밭

돌멩이 걷어내느라 손가락마다 피가 터지면서도

파란 하늘 한 뼘 두 손으로 퍼 올리던

그 선한 이들의 수줍은 미소가 눈앞에 그려진다

산모퉁이 너머 이웃 집 아이 돌잔치에 오르거나

가끔 먼 곳에서 온 나그네를 맞이해

길손과 주인장 너나들이로 느른국 퍼서

탁배기 한 사발 사이에 두고

깊은 밤 시름 휘휘 저어가며

국물 후후 불며 따뜻한 마음 나누었을까

강원도 정선 사람들

그 투박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먹는

한 그릇 느른국이 어찌 이리도 맑고도 서러운가

 

*/*** <정선아리랑>의 일 부분 참조

 

 


 

박선욱 시인

1959년 전남 나주 출생. 1982년 《실천문학》지에 시 〈누이야〉 〈그때 이후로〉 〈가려거든〉 〈잠든 조카를 보며〉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그때 이후』,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와 창작동화집 『모나리자 누나와 하모니카』, 청소년 평전 『채광석: 사랑은 어느 구비에서』, 『윤이상: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지식그림책 『행복한 이티 할아버지: 두밀리 자연학교 교장 채규철 이야기』, 어린이 평전 『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 『평화와 희망의 씨앗 김대중 대통령』, 『황병기: 천년의 숨결을 가야금에 담다』, 동시 해설서 『놀면서 배우는 교과서 동시』(저학년, 고학년용 전2권)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