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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준현 시인 / 수목 새벽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6.

김준현 시인 / 수목 새벽

 

 

바람 속에서 바람개비와 사라져 가자

 

열대어는 온몸이 기후에 가까운 단어였어 혈관을 어쩔 수 없어

뜨거워지는 시기가 오자

 

눈은 구체적이고 침을 삼키면 목이 아팠다

가습기가 하얗게 사라지는 수분을

숨을 뿜어내는 힘을

흰 머리카락이 어두웠던 과거를

 

끝내 드러내는 바다

수평선을 팽팽하게 만드는 사람의 눈을 감았다

 

온 만큼 가는가

간 만큼 남는가

 

갓 깬 새끼 거북이는 여름 초록 잎이 노랗게 물드는 속도로 기어갔다

 

날이 시퍼래서 새벽은 더디게 오고

목이 칼칼해서

노래는 나오기 전에 나이기 전에 지쳐 있었지

 

믿으세요, 미드세요, 발음이라는 게 얼마나 경계심이 없는지 너는 아니?

종교 경전의 페이지는 귀가 얇은 종이

밖에서 바람이

들어오려고 들어오려고 그래 이제는 막지 않겠어

 

창문을 열었다

푸른 인터폰 화면의 방문객처럼 언제나 새벽

빛을 놓치지 않는 별들만

내게 왔다

 

머리카락을 기르고 싶은 동물의 눈빛은 언제나 멀리 있다

 

 


 

 

김준현 시인 / 노랑 반팔 티셔츠 그 사람

 

 

노랑 반팔 티셔츠 그 사람은 물총을 들고 다녔다

물은 충분할까?

 

노랑 반팔 티셔츠 그 사람의 집은 반쯤 지하라고 했다

가만히 있어도 어두워지는 바나나의 기분을

이해하려고 했다

 

노랑 반팔 티셔츠 그 사람은 꽃을 향해 물을 쏘고 담벼락을 향해 물을 쏘았다

맞아도 소리를 낼 수 없는 그 기분이란

노랑 반팔 티셔츠 꽃무늬는 물 세탁을 해야 시들지 않아

놀리고 싶었다 에- 에- 소리 내며

 

여름에도 겨울에도 노랑 반팔 티셔츠 그 사람의 몸은 열대기후였다

 

노랑은 많은데 내 노랑에는 늘 사람의 잇자국이 익숙한 단무지가 있고 바람이 사는 데를 정하는 민들레가 있고 자꾸 먼 곳으로 늘어나는 고무줄이 있다 노랑은 멈추지 않고 바보였고 노랑 반팔 티셔츠로 내 몸의 넓이를 구한다면

 

바나나는 끄트머리에 농약이 몰린다는 것

칼로 끝을 잘랐다는 것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악몽이라는 것을 알았어 물병은 텅 비어 있어도 물을 앓고 있다

입이 닿지 않게 마셨다 맛과 관계없이

세계는 노랑 반팔 티셔츠 한 장만큼 남아 있었다

 

죽을 때까지 저 노랑 반팔 티셔츠일까? 시의 하체는 바닥에 닿을 듯

닿지 않았다 닻이라고 해도 모를 거고

닥치라고 해도 알 뜻 모를 뜻 세상이 가장 눈독을 덜 들인 곳으로

물을 쏘고 싶었다

물은 항상 부족했다

 

 


 

 

김준현 시인 / 겨울왕국 국민들

 

 

저 얼음물 담긴 물병을 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 같지?

사실 저건 탈출이야

 

추워서 못 살겠다고

하나 둘 밖으로 기어 나오는

물방울 국민들이야

 

 


 

 

김준현 시인 / 다섯 개의 심장

 

 

비가 내리면 아스팔트로 기어 나오는 지렁이에게는

다섯 개나 되는 심장이 있다

 

"어차피 말라 죽을 건데 왜 기어 나오니?"

 

심술쟁이 재민이가 말했지만 심장이 다섯 개나 되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심장 다섯 개가 쿵쾅쿵쾅 빗소리에 빠지면 몸을 S 자로 만들든 ㄹ 자로 만들든 온 힘을 다해 꿈틀거리며 나올 수밖에 없는 거다

 

 


 

김준현 시인,평론가

1987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영남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수료.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되어 등단. 2020.10.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평론 부문 수상. 시집『흰 글씨로 쓰는 것』동시집『나는 법』.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