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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헌 시인 / 배롱나무 사원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6.

김지헌 시인 / 배롱나무 사원

 

 

신흥사에 가보니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딱 하나

배롱나무에 힘껏 제 것을 박아 넣은

적송을 보기 위함이라

나는 그 희한한 광경을 이쪽저쪽

줌을 맞춰가며 카메라에 담는데

 

근처 해산당과 세트로 기를 받으면

왕건 같은 아들 하나 점지해 준다니

천년 고찰에서

이종교합 불륜을 부추긴다?

 

한여름 땡볕의 고요가

어쩐지 불길하기만 한데

꽃 피는 일이 일생의 전부인 베롱나무가

제 속엣껏 모두 퍼주고

공즉시색

속이 텅 비어가자

부신 햇살에 잠자던 솔 씨 하나가

눈 뜬 것이리라

그래서 죽어가던 배롱나무도

이심전심이 된 것이리라

 

 


 

 

김지헌 시인 / 거룩한 밥상

 

 

폭설이 강타하던 설날

아침도 거른 채 새벽바람에 나선 성묘길

미끄러지고 고꾸라지며 산에 올랐는데

세상에!

조상님들 이미 푸짐한 제삿상

받고 계시다

겨울 햇살 아래 달그락달그락

숟가락 부딪는 소리 들린다

궁시렁 궁시렁 시어미 잔소리도 들린다

수많은 봉분들마다 흰쌀밥 고봉으로

정갈하게 차려내신 분,

누구의 따뜻한 손일까

밥상 물린 아버님 담배 한 대 물려드리고

보온병의 커피도 따라드린다

아버님 어머님 드시고도 남아

까치 가족들도 한 밥상에 빙 둘러앉았다

흰 눈이 천지의 경계를 지우고

삶과 죽음이 둥근 밥상 머리위에서

만나는 순간,

 

 


 

 

김지헌 시인 / 피리

 

 

한 남자의 영혼과 동거에 들어갔다

사람의 정강이뼈로 만들었다는 피리소리

천산산맥의 바람에 실려와

내 정수리를 후려친다

 

히말라야 빙하에 살던 설인이었을까

삼백예순 날 제 몸 너덜너덜해지도록

오체투지하던 순례자였을까

제 울음 밀어올려 몸통을 관통해온

저 소리는 분명 티베트 설인의

빛나는 사리였을 것

 

설산 어느 고승이 만들었다는

인류 최초의 악기

제 몸 찢고 뚜벅뚜벅 내게로 온

그 남자의 둥근 몸

 

우듬지와 실뿌리 사이

 

팥배나무 가지에

별들이 하나 둘 돋아난다

첫 옹알이 하듯

대지의 젖을 힘껏 빨아올려

허공으로 솟구치는

언어들

 

우듬지와 실뿌리 사이

제 몸의 중심을 관통하는

모든 치열한 사랑의 끝에

꽃이 핀다

 

 


 

 

김지헌 시인 / 저물녘

 

 

서강으로 향하던 강물도 아주 잠깐 흐름을 멈추는

놀이터에서 왁자지껄 놀던 아이들을 집으로 모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무엇이 되지 않아도 만나고 싶어지는

점박이 별들이 쪼르르 기어나오는

 

가까스로 치욕도 견딜 것도 같은

그대와 내가 조금씩 무릎과 무릎을 당겨앉는

원고지의 자음과 모음이 앙상한 늑골을 어루만지며

어제 버린 시를 다시 읽고 싶어지는,

 

 


 

 

김지헌 시인 / 족두리꽃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자세를 한껏 닞추어야만 한다

평생을 뻘밭에서 호미질 하느라

남당포구 새우처럼 등딱지가 오그라든,

 

그녀도 한때는 수줍은 새색시였다

열여섯에 시집 와

게딱지처럼 납작 엎드려

한 생을 살아오면서도

 

자주빛 고깔모자 살짝 들어 올리면

볼우물 배시시 웃을 줄 아는

천생 여자인 그 여자

 

 


 

김지헌 시인

1956년 충남 강경에서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학 과학교육과 졸업.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다음 마을로 가는 길』『회중시계』와 『배롱나무 사원』『황금빛 가창오리떼』 등이 있음. 2005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한극시인협회 간사. 국립공원관리공단  자문위원. 현재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