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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승리 시인 / 자연의 아이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7.

장승리 시인 / 자연의 아이들

 

 

죽어서 걷는 길을 보았던 걸까

정작 죽어서는 볼 수 없는 길을

길 한쪽으로 정렬한 백목

그림자조차 눈이 부시다

왼쪽 풍경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내 발자국을 따라오다

문고리가 없는 나를 두드린다

나조차도 들어갈 수 없는 나

나를 통과한 계단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문 바깥쪽에서 깨져 버린 발자국들이

마음껏 흩어지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다 담배를 문다

구름 한 모금이 내 몸 한구석에 길게 드리워진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증조할머니가 남편이 되어 내 옆에 누워 계신다

나를 꼭 잡고 있으면서 제발 자기를 놔 달라니

 

* 프리드릭 토르 프리드릭슨의 1991년 영화

 

 


 

 

장승리 시인 / 폭식

 

 

눈물은 숟가락 같고

나는 배가 너무 고파서

못다 한 이야기,

못다 할 소음은 왜

침묵이라고 불리나요

숟가락 위 작은 새

경계가 가장 가려워요

참지 못하고 또 긁어요

상처가 번지고

경계가 이동해요

경계 아닌 곳이 없는 곳에서

나는 죽은 새를 만질 수가 없어요

한 번만 더 말할게요

나는 작은 새를 사랑해요

 

장승리, 『반과거』, 문학과지성사, 2019년, 12쪽

 

 


 

장승리 시인

1974년 서울에서 출생. 한세대 신학과 졸업. 2000년 서울여대 사회사업학과 졸업. 2002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에 〈알리움〉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습관성 겨울』(민음사, 2008)과 『무표정』(문예중앙, 2012)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