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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선이 시인 / 골안사(骨安寺)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5.

이선이 시인 / 골안사(骨安寺)

 

 

위태롭게 매달린 현판을 보고서야 이곳이 절집임을 알았다  

마당이 등산로 입구인 법당

장지갑만 한 카세트 라디오가 천수경을 웅얼거렸다

앞니가 두어 개 빠져 있었다

초막 같은 공양간 함지박에는 물때 오른 고무호스가 고개를 처박은 채  

속물살 달래느라 등골이 싸늘했다  

몸 한쪽이 마비된 노인이 시나브로 걸어와 목을 축이면  

물발이 살짝 난폭해지다 이내 연해졌다

젖은 앞섶에 주름 많은 손 얹고 봄 우레 엿듣는 사이

뼈를 쪼듯

홀딱벗고새가 울어댔다

 

 


 

 

이선이 시인 / 늙은 고슴도치의 고백

 

 

寒天 너머 언江, 그걸 건너기가 쉬운 일은 아닐세

연산홍빛 눈망울에 생을 내걸고

서리서리 깎아지른 산길 질러질러 내달리면

어디에도 낭떠러지인 돌산

그게 생이었던가 싶네 그려

상처에서 돋아나는 가시를 경멸했지만

그러나 온몸이 가시로 뒤덮힌 나는

한마리 주름진 저주일 뿐

 

나 또한 생의 어딘엔가 흐르기도 했을

짙푸른 봄강을 건너기도 했지만

한세상 악물었던 어금니

그 어금니 섰던 자리에 고이는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 분노 같은 것으로

내 가시는 毒을 키우고

 

그러니 젊은이 보게나

내 가시 끝에 얼마나 많은 애증이 물들었는지

때로는 아팠고, 때로는 아프게 했던 세월의 풍상을

내 어떻게 간직하고 있는지

이제는 아름다울 것 없는 쇠잔한 눈빛 가득

盞(잔)을 채우며

寒天 너머 언江 저편으로 난 길을 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선이 시인 / 운우지정(雲雨之情)

 

 

뒤꼍에서

서로의 똥구멍을 핥아주는 개를 보면

개는 개지 싶다가도

이 세상에 아름다운 사랑이란 저리 더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물러서는

마음도 미끄러진다

 

평생 바람처럼 활달하셔서

평지풍파로 일가(一家)를 이루셨지만

그 바람이 몸에 들어서는 온종일 마룻바닥만 쳐다보시는 아버지

병 수발에 지친 어머니 야윈 발목 만지작거리는 손등을

희미한 새벽빛이 새겨두곤 할 때

미운 정 고운 정을 지나면 알게 된다는

더러운 정이라는 것이 내게도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그런 날 창 밖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려

춘향이와 이도령이 나누었다는 그 밤이 기웃거려지기도 하지만

그 사랑자리도 지나고 나면

아픈 마나님 발목 속으로

불구의 사랑이 녹아드는 빗소리에 갇히기도 하는데

 

미웁고 더럽고 서러운 사람의 정(情)이란 게 있어

한바탕 된비 쏟아내고는 아무 일 없는 듯 몰려가는

구름의 한 생(生)을 머금어 보곤 한다

 

 


 

 

이선이 시인 / 물소뿔을 불다

 

 

티벳을 가야겠다는

손금 같은 사연 담은 엽서 한 장

물끄러미 내다보는

오동나무 잎새 사이로

물소 한 마리 걸어나왔다

 

유적지 가을하늘을 돌아나가는 바람소리 들릴 듯한 눈망울이

멀뚱하다

 

저 물소와 함께 산다는 히말라야 고산족(高山族)은

죽음 곁에 이르러

그 흔하디흔한

꽃 대신 눈물 대신에

물소뿔을 불어준다 한다

 

우리 사는 동안

가슴을 들이치기만 하던,

바로 그 멍들

다음 생(生)까지는 가져가지 말자고

새로 태어날 슬픔까지를 노래로 날려보내는 것이다

 

사는 동안 한 번도 넘지 못했던 얼음산을

훌쩍,

녹이며 넘어가는 것이다

 

 


 

이선이 시인

1967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 19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서서 우는 마음』과 평론집 『생명과 서정』 그리고 『상상의 열림과 떨림』 등이 있음. 현재 경희대 한국어학과에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