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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이엽 시인 / 담장 밑에서 읽은 국화 소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5.

장이엽 시인 / 담장 밑에서 읽은 국화 소설

 

 

 갓 스물에 시집와 오십 년 넘게 함께 살았어도 늘 학 같은 사람이었어야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고 정갈해서 노인병원에서 간병인들한테 아랫도리 뵈 주기 싫다고 볼일도 시원하게 못 봤던 게 늬 아버지였니라 우수 경칩 다 지났는데 그날 아침 웬 눈이 그리 많이 왔던고 그 전날 볕이 따숩고 맑았는데 바람 끝이 보드라워서 인자 겨울 다 지났으니 꽃구경 실컷 하겠다 했더만 저녁나절에 한나 둘 떨어지던 진눈깨비가 함박눈이 되어서 그렇게 온 천지를 덮었어야 아버지 화초 가꾸는 정성이야 오죽 했간디 재 만들어 오줌 섞고 묵혀서 한두 번 뿌려준 게 아니여 지난해에 죄다 피었다 지고 난 다음 잘 뵈지도 않는 눈으로 한해살이 씨받아 두더니 땅 뒤집고 붙박이 나무들 밑둥치마다 한 삽씩 푸짐하게 뿌려 줬니라 앞다투어 피었다 다 지고 밭 색깔이 수척해졌는데 가을걷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 이장네 이사 가면서 퍼다 심은 저것이 늦게 사 몽실몽실 몽우리가 오르더니 늬 아버지 병원 가려고 가방 챙기던 섣달까지 활짝 웃고 대문 나가는 걸 전송했니라 겨울 지내고 얼른 와서 저거 거름 맹글어 준다 하고선……. 나는 그런다 새벽이면 늙은 수탉 맹키로 잠 깨서 푸드득 홰도 쳐보고 늦게 지는 새벽 별똥 한 바가지씩 퍼다가 해뜨기 전에 술술 여기저기 뿌려준다 그러면 내가 저 꽃밭 가득 화초도 피워 보고 그 꽃 보러 늬 아버지 오거들랑 냉장고에 사다 놓은 홍어 살이라도 몇 점 저며 저물어가는 가심 속에 뒹구는 이야기나 나눠 볼란다 사는 게 별거 있가니 나오는 순서가 있다 해도 가는 순서는 없니라 서릿발 머리에 이고 뜨건 가심 식히는 가실 국화가 그래서 이렇게 이쁜 거 아니겠냐

 

 


 

 

장이엽 시인 / 조사 '과'에 대한 오해

 

 

말과 말 사이에는 ‘과’가 있었다

그 ‘과’를 이어가기 위해 입속에 조각칼을 종류별로 숨겨 놓고

비누에 나무에 꽃잎에

심지어 하얀 종이의 심장까지 말의 문양을 새겨가는 것이다

  

계획적이고 반듯한 삶을 살고 있노라는 당신의 말에

나는 건강한 삶을 살고 있군요 라고 답했다

계획적이고 반듯한 삶이 건강한 삶이라고 표현한

나의 감정이 참 평화로워 보인다면서

당신은 기다란 여백에 화살표를 올려놓고 음 음…하며 배회하고 있었다

말줄임표 사이로 감추어진 거리는 얼만큼인가

  

‘과’가 징검다리로 놓여 있을 때

나는 다리가 짧아 건너뛸 수가 없으면서

생각은 이미 넘겨짚음으로 저편까지 건너가

당신의 마음을 알겠다고 경솔하게 내뱉어버림으로

‘과’ 뒤에 이어질 진실에 대한 오해는 깊어진다

  

그럼 바람 한 자락 주머니에 담아 다른 하늘 아래로 잘 가라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끼리 건네는 작별인사도

현실은 외면당한 채 말과 글의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는데

사실을 더 이상 다른 이면으로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말과 말 사이에는

마주보는 창문처럼 맞바람이 쳐야만 한다는 걸

 

 


 

 

장이엽 시인 / 거처(居處)

 

 

수목한계선을 넘지 못하는 눈잣나무

바위 사이를 곡예하듯 살아가는 산양

바위지대에서만 번식하는 망개나무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터를 잡는 참갈겨니

높은 산 계곡이나 습지를 찾아 자라나는 모데미풀

어둡고 축축한 나무를 찾아다니는 팔색조

얕은 바다의 파도에 휩쓸리며 살아야 하는 거머리말

해안선을 따라다니며 사는 상괭이

찬 물속의 금강모치

부리로 구멍을 뚫으며 살아가는 오색딱따구리

  

우리 산하의 깃대종들이다

아니다,

발붙일 곳을 찾아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 어느 한 곳

도처에 터가 넘쳐도 내 발 디딜 곳은 어느 한 곳

  

밥이 나는 곳에 눈물을 삼키고

집을 세울 곳에 신념을 묻기도 하면서

식물이나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거처(居處)를 마련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장이엽 시인 / 너무 이쁜 여자

 

 

야야, 이 꽃 좀 봐라!

참 곱기도 허다

나, 이 꽃 앞에서 사진 하나 박아 도라

팔순 노모는 꽃 앞에만 서면

아직도 여자다

  

좋은 그릇 찬장에 넣고 싶고

예쁜 옷 입고 싶고

윤기 나는 항아리 장독대에 올리고 싶은

여전히 살림살이 좋아하는 여자다

  

지 눈으로 보고

지 이빨로 깨물어 먹어야 맛나다고

지 손발로 움직여야 한다고

지 귀로 듣고

지 코로 숨 쉬다 가야 한다고

뭣이든지 지 힘으로 하는 것이 존 거라고

친구들이랑 짜장면도 사 먹고

굽은 허리 세우고 훌쩍 마실도 나갔다 오는

똑소리 나는 여자다

 

어떤 날에는

단풍 구경 갔다 오니 불 꺼진 방이 서럽더라고

마당 구석에 한 촉 난 꽃이 피었는데

먼저 간 양반 생각나 그 앞에 주저앉아 울었노라고

자식에게 전화 걸어 흐느낄 줄도 아는

참말로 꼭 안아주고 싶은

너무 이쁜 여자다

 

 


 

 

장이엽 시인 / 이어폰을 나눠 꽂고

 

 

가끔 아이들과 이어폰을 나눠 꽂고 음악을 듣는다.

머리를 맞대고 나란히 눕거나 의자에 딱 붙어 앉아

건들건들 어깨를 흔들어보고 손가락 장단도 맞추면서

소리가 섞이지 않도록 주파수를 찾아가는 한쪽 귀와

혹은 기울어지지 않게 균형을 맞추는 한쪽 귀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다가 불쑥 나누는 몇 마디

이거 좋은데, 옛날에는 말이지

뜬금없는 궁금증과 대답들이 이어졌다가 끊기다가

이어졌다 끊길 때 틈을 채우는 가수의 목소리

연주되는 악기 소리 그 너머로 읽히는 각자의 성향들

아이는 목젖이 보일 듯 시원하게 뚫리는 고음에 빠져들거나

나지막이 속삭이는 우울한 음색만 들으려 하기도 한다.

나는 낙숫물처럼 또박또박 떨어지는 소리를 좋아하고

금속성의 맑은 음색을 선호하기도 했으니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일치한 적이 별로 없었다.

함께 음악을 듣는 순간조차 때로

혼자만의 여행을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곤 하는 길

불규칙적으로 찾아오는 낯선 감정을 관찰하면서

일상의 소음을 멀리 두고 서로의 간격을 조절해 간다는 것

음악이 흐르는 동안

아이는 휘파람으로 나는 허밍으로 따로 또 같음을 위하여

가끔 이어폰을 나눠 꽂고 음악을 듣는다.

 

 


 

장이엽 시인

1968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09년 《애지》봄호 신인문학상에 모서리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2011~201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분야 차세대예술인력집중육성지원(AYAF) 대상자선정,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삐뚤어질 테다』(2013, 지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