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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기복 시인 / 어떤 청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6.

정기복 시인 / 어떤 청혼

 

 

바다 쉴새없이 뒤척여

가슴에 묻었던 사람 하나

십 년 부대껴 떠나보내고

달무리 속 대보름달

생선 속살 모래밭에

연어 같은 사람 하나 던져 주었네

 

그대!

잘먹고 잘사는 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빠,

다 읽었는데 전태일

그 사람 그 뜨거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썩는다는 것이다

씨앗으로 썩어 어머니 젖가슴 닮은

봉분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대,

흙 토해 지름진 흙이게 하는

지렁이처럼 살자

 

 


 

 

정기복 시인 /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손짓하지 않았다. 측백나무 울타리 곁에 서서 비바람에 흔들리었다고 네게 떠나라 이른 것은 아니었다. 네가 집을 나선 것은 시리고 아린 나날 새벽 기차의 기적을 못 견디어 한다 추측할 뿐 빗방울 맺힌 잎새와 고개 숙여 핀 꽃잎의 가련함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 나는 다만 갈라진 손마디로 휘저어 붙잡는 네 어미의 젖은 소매와 휑한 눈을 바라보았을 뿐, 마당 한 귀퉁이 장독대 정화수 흰 사발 바라보았을 뿐…… 하늘거리며 서서.

 

맨 처음 그날 철둑 넘어 산비탈에 선 내게 왔다 네 마당가에 나를 데려간 일은 네 여린 성정 탓이겠으나 유혹하지는 않았다. 보드라운 꽃술로도 어지러운 향과 색으로도 너를 부여잡고자 하지 않았다. 우연이나 인연조차도 내 바람과는 관계없는 일. 뿌리가 뽑힐지라도 대가 꺾일지라도 줄기가 잘릴지라도 검게 빛나는 주아가 눈물처럼 달려 있는 한 새벽이슬 네 마당가에서 그러하듯 나 아니어도 꽃은 네 발길 지나는 곳 어디라도 피어났을 테니. 떠나고 돌아옴을 지고 다시 피움으로 마냥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을 뿐.

 

 


 

정기복 시인

충북 단양 출생. 1994년 《실천문학》겨울호로 등단. 시집으로 『어떤 청혼』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