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복 시인 / 어떤 청혼
바다 쉴새없이 뒤척여 가슴에 묻었던 사람 하나 십 년 부대껴 떠나보내고 달무리 속 대보름달 생선 속살 모래밭에 연어 같은 사람 하나 던져 주었네
그대! 잘먹고 잘사는 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빠, 다 읽었는데 전태일 그 사람 그 뜨거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썩는다는 것이다 씨앗으로 썩어 어머니 젖가슴 닮은 봉분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대, 흙 토해 지름진 흙이게 하는 지렁이처럼 살자
정기복 시인 /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손짓하지 않았다. 측백나무 울타리 곁에 서서 비바람에 흔들리었다고 네게 떠나라 이른 것은 아니었다. 네가 집을 나선 것은 시리고 아린 나날 새벽 기차의 기적을 못 견디어 한다 추측할 뿐 빗방울 맺힌 잎새와 고개 숙여 핀 꽃잎의 가련함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 나는 다만 갈라진 손마디로 휘저어 붙잡는 네 어미의 젖은 소매와 휑한 눈을 바라보았을 뿐, 마당 한 귀퉁이 장독대 정화수 흰 사발 바라보았을 뿐…… 하늘거리며 서서.
맨 처음 그날 철둑 넘어 산비탈에 선 내게 왔다 네 마당가에 나를 데려간 일은 네 여린 성정 탓이겠으나 유혹하지는 않았다. 보드라운 꽃술로도 어지러운 향과 색으로도 너를 부여잡고자 하지 않았다. 우연이나 인연조차도 내 바람과는 관계없는 일. 뿌리가 뽑힐지라도 대가 꺾일지라도 줄기가 잘릴지라도 검게 빛나는 주아가 눈물처럼 달려 있는 한 새벽이슬 네 마당가에서 그러하듯 나 아니어도 꽃은 네 발길 지나는 곳 어디라도 피어났을 테니. 떠나고 돌아옴을 지고 다시 피움으로 마냥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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