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섭 시인 / 물집
겨울이 오면 물도 집을 짓는다 매서운 바람에 어깨 출렁이며 물의 결을 따라 투명하게 곪아간다 맑은 생을 삭혀 지나온 시간 덮는다 허공이 먼저 집이 되어 낮게 움츠린 바닥 응시하고 있다 뜨거운 가슴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물의 살갗들이 부풀어 오른다 출구가 없는 지붕 하얀 통증으로 팽팽하고 주춧돌도 기둥도 없이 물만 있는 집 끊임없이 부대끼며 지껄이는 말들이 수면으로 오르지 못하고 얼어붙는다 제 몸 얼려가는 지붕은 물속 소리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뿌리에서 솟구쳐 나오는 환한 눈물 흘릴 때까지
이희섭 시인 / 능금은 우리를 멈추게 한다
도심의 나무에는 능금이 달려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곳마다 수많은 길들이 능금나무를 키우고 있다 늘 길의 중심으로 뻗어있는 가지 무거운 옷 벗어놓고 열매만 달고 있다 능금 속에서 가을은 둥글어가고 지나는 심장들을 모두 멈추게 할 만큼 농익었다 달리고 걷는 것들은 뒤돌아볼 줄 모른다 욕망을 뒤집어 쓴 껍질을 까고 나도 벌레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달콤한 육즙 빨아 먹으며 햇살 조각의 무덤을 더듬는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씨방에 이르러서야 네 심장은 비로소 멎었다 시간은 분주하게 자맥질하는데 잠깐 쉬었다 가는 짧은 순간의 거래 능금은 우리를 멈추게 한다 끌려가는 생들을 내려다보는 한 조각 붉은 달이 떠 있다
이희섭 시인 / 수리수리 마수리
앉은뱅이 주인은 못 고치는 게 없다 5평 남짓한 곳 담배와 전기재료를 팔며 온 몸이 차가워진 것들, 이름뿐인 것들을 따뜻하게 해달라고 주문 받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받으며 등장하는 마술사 불빛이 테이블에 오른 몸체로 흘러내리고 십자드라이버 돌아갈 때마다 엉켰던 시간들 풀어지고 장기들 드러낸다 몸체는 조각조각 분리되어 가늘게 떨며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려 호흡을 멈춘다 고장난 심장 달고 끊어진 핏줄 이으면 막혀 있던 혈관 뚫린다 풀린 나사들이 주인의 머릿속을 조이고 수리수리 마수리, 입김 훅 불어넣으면 잃어버린 기억의 회로들이 되살아난다
운명의 색깔이 바뀌기 전 건각의 마라톤 선수였다는 그는 늘 다리가 분리되는 마술을 하고 있다 매일 밤 잠자는 마술을 걸어놓으면 순간 사라졌던 다리가 나타나고 잘려져 나갔던 영혼을 수리한다
불빛이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이희섭 시인 / 틈이 만드는 자유
벽에 틈이 생긴다 세월이 만들어 낸 흔적이다 내려앉지 못하고 떠돌던 먼지도 받아주고 날벌레들도 그 틈에 자신을 묻는다 벽은 포개지지 않으려 뒤척이며 한 번 놓은 손을 다시 잡지 않으려 한다 벽으로 서 있었을 때는 몰랐지만 틈의 간격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되돌아오기만 하던 소리, 냉랭했던 공기, 굳어있던 말들이 이젠 틈 속으로 스며들고 그동안 모래가 되고 시멘트가 되고 벽이 만들어졌던 세월을 그 속에 풀어 놓는다 틈은 때로 상처를 만들지만 달콤한 말들이 새살을 돋게 한다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자유 틈을 통해 보이는 저편의 세상이 밝게 빛나고 있다
이희섭 시인 / 여량역*
구절리행 마지막 열차가 떠난 자리 하늘이 붉게 녹슬어간다 플랫폼을 서성이던 바람들과 구름의 조각들 열차 따라가며 낡은 기적소리 품는다 까만 핏덩이들 나르던 선로가 핏줄로 일어서던 어느 날 열차 기다리는 승객들 탄가루처럼 까만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하늘보다 산이 더 크게 보이는 곳 떠나보낸 열차시간표만 역사를 지키고 있다 느린 속도로 구절리로 들어섰을 열차 평소에 꿈꾸던 棺 속으로 들어갔으리라 지나 온 길 지우지 않는 열차 바람의 거짓말을 용서하였다 아우라지의 거친 숨소리 귓전에 맴돌고 둥글게 굴러갔던 기억의 무늬를 읽는다 고개 들면 다칠세라 나오지 못했던 구절초 침목 위로 살며시 고개 내미는 저녁 여전히 붉은 하늘 들고 늙은 길 쓰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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