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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은심 시인 / 고욤나무 아래의 生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8.

이은심 시인 / 고욤나무 아래의 生

 

 

산 입구에서 손금 보는 노인이 나를 부른다

자신의 손금 위에 전을 펴고 앉은 노인은 내 직업이

사람이라고 할 테지만 허리 굽혀 세수를 하면 찬물에

코피가 뚝 뚝 듣는 직업병이 중증이라고 할 테지만

진실로 내가 꿈꾸는 그 하나의 병명은 모르리라

 

세상과 접붙기를 거절한 고욤나무 아래 잉잉대는

꿀벌들이 떫은 사랑에 몸 섞은 것은 모르리라

 

팔월 한가운데 나를 낳아 다사多事와 다난(多難)의

물을 주어 키우신 엄마가 하필 제라늄만 좋아하시는 것도,

먼 우주를 밥그릇 하나 달랑 차고 건너온 후 날품을 팔아

생활을 사러 시장에 가면 단골집은 늘 상중喪中인 것도

모르리라

 

인구 백만의 중소도시에서 백만 분의 일만큼 흐렸다

개였다 하며 꿈인가 움켜쥐면 불온한 고욤나무 열매 따위,

팔월생 바람에 얽히고설키는 내 생의 머리카락이나

족집게로 집어낸다면 모를까, 감히 빵으로 배를 채우려한

잘못을 선선히 바꿔준다면 모를까

노인은 자꾸 나를 부르지만

 

 


 

 

이은심 시인 / 참깨

 

 

눈에 띄지 않게

꽃조차 숨어 피고 하늘빛 말고는 닮지를 말아야지

수수한 이파리의 누누이 타이르는 참말이 되어야지

허수아비의 앙상한 가슴을 파헤쳐 한 톨 씨앗의 어눌한

말씀을 축낸 새들이 날아오를 때

깨꽃 흰 불꽃을 목 빠지게 이고 따글따글 여물며

간담 서늘한 참말이 되어야지

정직한 채마밭에서 깻단을 터는 농부의

작대기에 얻어맞으며

입술 부르트더라도

두어 되 허튼 소리 딴청은 말아야지

아님, 참말보다 더 참말인 말없음이 되어야지

 

 


 

 

이은심 시인 / 작은 꿈 하나

 

 

흰 빨래처럼 살겠습니다

날마다 비누의 독한 눈물 속에

한 채의 신전을 세우고

서늘한 물소리에 몸 닦으며 살겠습니다

눈부신 풍장의 누구네 집 마당

따스한 가슴과 가슴 사이

팽팽한 줄 하나 걸고

때 묻은 골격

그 앙상한 그리움을

바람결에 펄럭여도 보겠습니다

 

얼룩 한 점 없이 그저 그렇게 맑은 날

하늘빛에 정분이 나면

찬물을 뒤집어 쓴 내 혼魂이

곤고한 지평선을 달리는 줄 알겠습니다

더러는 빈부와 귀천을

한 나절 햇살에 감사히 말리겠습니다

지우고 다시 꽃 피우는 죄의

저 현란한 은유에 소스라치며

한 생애 가득 뉘우침이 많은

흰 빨래로 살겠습니다

 

- 이은심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2004

 

 


 

 

이은심 시인 / 태백, 겨울

 

 

너와집 정지간에서 장작불을 지피는 아낙은

아이 셋 낳고도 동아줄 타고 하늘에 오르지 못했다

자신밖에는 구해줄 이가 없다고

굿세게 우거지는 뒷산나무들

그 밑둥에 덧대어 차린 밥집

마당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얼어붙어 칼이 되었다

투명한 날개옷 한 벌도

아낙의 가슴에서 평생 버석거릴 터

 

신탁을 깨트린 눈이 내리고

사모하면 더 깊어지는 적막강산

 

사실보다 더 아름다운 환상은 없다

 

눈 쌓인 아침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고 밥을 푸는가

아낙의 반쪽 옆얼굴이 어룽져 갈라터진 바람벽에

하마 해를 넘겼을까

다리 다친 까치들이 글자를 찍어놓았다

 

- 어서 빨리 오십시요

- 꼭 또 오십시요

 

- 이은심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2004

 

 


 

 

이은심 시인 / 가슴에 천둥소리를 묻고

 

 

다시 또 비가 내린다

 

비는, 먼 기억 속 시골집 함석지붕에 몰려가 내린다.

그 지붕 아래 쬐끄맣게 엎드려 구약성서를 읽는

아이의 나른한 율조를 시늉하며 내린다.

그리고 비는, 앗시리아, 바벨론, 여리고 같은 낭창한

이국의 지명처럼 이제는 어른이 되고 만 아이의

감수성에 심하게 개입한다.

오늘의 비는 그렇게 내린다.

 

年前, 어느 새벽 트로이에서 바라본 에게海는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잔잔하고 아늑했다.

굳이 별빛이나 바람이나 역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충분히 고혹적이었다. 그러나 파도가 없어서

눈매가 돌계집같이 서럽던 바다.

구애의 몸짓을 몰라서 물고기 한 마리 낳지 못한다는

그 해안선이 중얼거리던 傳言을 나는 얼핏 들은

듯도 했다. 뒤끓는 설레임 없이는 사랑의 터럭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는.....

 

그렇다.

석 달된 핏덩이 지우듯 처절하게 자신을 다루지

않는다면 한 줄의 글인들 누구에게 닿아서

따스한 가슴이 되겠는가.

끝내 온기 한 번 품어보지 못하여 구천을 떠도는

처녀귀신이 된다한들 무슨 율법으로 뒤늦은 후회를

다스리리.

평생을 바쳐 하늘이 거기 있음을 증언하는 별이여

봄내 울어쌓던 검은등뻐꾸기여

풀 한 포기 키우지 못하는 내 누추함을 연민하며

스스로 피어난 섬초롱꽃이여

모두모두 고.맙.다

 

 


 

이은심(李恩心) 시인

1950년 대전 출생. 한남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2003년『시와 시학』 신인상 수상. 시집으로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2004), 『바닥의 권력』(황금알, 2017)이 있음. 2017년 대전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수혜. 2019년 대전일보문학상 수상. 2019년 한남문학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