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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수호 시인 / 새우의 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7.

천수호 시인 / 새우의 방

 

 

불빛이 환한

창이랄까 방이랄까 저 좁은 곳

누군가 맨홀을 걷어차며 던진 돌들이 쌓여

바닥이 되고 담장이 되었다

한밤중의 좁은 방 한 칸으로 집약되는 세계

언제부턴가 습관적으로

걷는다리는 접고 헤엄다리로 오르내린다

오른쪽 더듬이만 까딱이는

도대체 식사시간을 알 수 없는 주섬주섬의 식습관

유목생활의 너른 들판인 냉장고 속을 추리다보면

운 좋은 날엔 고기 한 조각도 씹을 수 있다

방향이 불분명한 물소리를 타고 올라가

허공을 기웃거려도 보지만

불빛은 가짜였고 폭죽은 더 어두운 땅으로 떨어졌다

여기서 우주란 없다

잔발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동안 발의 개수는 무수해졌고

발을 쓸 수 있는 방은 더 좁아졌다

인맥이라는 광맥은 처음부터 분포도가 없다

알고 지낸 사람들은 눈동자로만 요약되어 창을 가득 메우고

너머의 광막한 어둠은 그 눈동자들의 괄약근처럼 조몰락거린다

뒷주머니까지 까뒤집어 보여준 훤한 장면들

새우의 방식으로 등을 휘어본다

혼자만의 시간이 흐르는 단단한 집

뚜껑이 열리면 더 깊은 어둠으로 튀어오를 수 있는,

 

 


 

 

천수호 시인 / 권태

 

 

곰삭다, 라는 말에 들어앉아 있는

저 곰 한 마리를 쫓아낼 순 없나

일어서지도 걷지도 않고 웅크린 채

기어가는 건지 걸어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족속의 행동에 총구를 겨눈다

총을 모르는 이놈은

한 손으로 슬쩍 밀어낼 뿐 도대체 긴장하지 않는다

발 앞에 떨어진 불발탄을 내려다보며

울지도 놀라지도 않는다

속이 다 삭아서 뼈도 없는,

큰 입만 한 번 벌렸다 닫는 저 곰

 

 


 

천수호 시인

1964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시집으로 『아주 붉은현기증』(민음사, 2009)과 『우울은 허밍』(문학동네, 2014)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명지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