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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정대 시인 / 아침부터 보스포루스 해협 횡단하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7.

박정대 시인 / 아침부터 보스포루스 해협 횡단하기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나뉜 이스탄불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파묵 아파트가 있는 이스탄불

이란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이스탄불

이스탄불 공항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이륙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지,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흔들리던 비행기 동체, 착륙할 때도 마찬가지였지

가끔씩은 흔들려야 아름다워지는 삶도 있지

그게 인류의 삶이지

이스탄불 공항의 흡연실은 세계 흡연 동지들의 집결지

각자가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는 각자의 사연도 깃들어 있지

그곳에서 이절은 카파도키아의 동굴집 만큼이나 멀지만

눈이 내리면 그 풍경은 같지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눈송이낚시를 하지

인류가 위대해질 수도 있는 것은 눈송이낚시를 할 수 있기 때문

눈의 이름을 묻고 눈과 어깨동무하고 함께 걸을 수 있기 때문

인류는 감자만 먹어도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다

아침의 창문을 열고 작은 숲을 바라볼 수 있으면 인류는 아름다워질 수 있다

천천히 강변 둑을 산책하며 여름 한철의 비단뱀들과 아름답게 인사를 나눌 수 있다면

코끼리가 살지 않는 곳에서도 인류는 거대하고 위대한 상념에 들 수 있다

강원도 이절에는 하늘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코끼리 구름이 있고

이스탄불에는 하늘을 나는 흔들리는 비행기가 있지만

이스탄불에서

이절에서

나는 담배를 피운다

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담배 연기는 흘러 끝내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

(1)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가 떠오르는 아침이다

울릉도에는 아름다운 북면이 있고 북면은 그 어디에 있어도 아름답겠지만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작은 숲을 바라보며 시를 쓴다

이것이 <아침부터 보스포루스 해협 횡단하기>이다

상상만으로 겨우 존재하는 아침이 있다

물, 불, 흙, 공기가 아름답게 존재하는 아침이 있다

그러나 아직 인류에게 제5원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간 『시와 사상』 2021년 가을호 발표

 

 


 

 

박정대 시인 / 이절에서의 눈송이낚시

 

 

어제는 내내 무척 아름다웠다

숲 속의 음악, 내 머리칼 사이와 너의 내민 두 손 속의 바람, 그리고 태양이 있었기 때문에1)

 

아름다운 오랑캐의 계절을 찾아가자

 

생선 비린내가 난다는 어성초, 하얀 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강마을에 사는 누군가는 쌀을 씻어 안치고 생선을 굽지

 

밥 짓는 저녁연기 피어오르면 조금씩 돋아나는 초저녁별들, 호롱불 아래서 누군가는 어성초 편지를 쓰고 또 누군가는 어성초 편지를 읽겠지

 

이절, 불란서 국화(菊花)라는 데이지 꽃이 피는 곳

돌배나무 꽃들이 지상의 별처럼 환하게 매달려 있는 곳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2)

 

1

 

이절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오랑캐의 계절은 무엇인가 그런

말들은 거란의 말인가 여진의 말인가 바람에 흩어지는

가랑잎 같은 어느 오랑캐의 말인가

언어가 눈송이처럼 쏟아지는 밤

나는 아직도 나의 언어를 모른다

눈의 이름을 물으며 첫눈의 언어를 찾아

말을 타고 석 달 열흘 다시 길 떠나는 밤

말안장 위에서 여전히 타오르는 저 불꽃의 언어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일절은 여기서 끝

 

2

 

아름다운 오랑캐의 계절을 그냥 이절이라 하자

 

3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는 밤이다

 

나도 언젠가 내가 꿈꾸는 곳으로 갈 것이다

 

4

 

60알의 원두는 60가지의 상상을 제공한다 60알의 원두는 내가 평소에 마시는 에스프레소의 양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고 천천히 걸어서 숲을 산책한다

 

교향곡 4번 <낭만적>은 커피와 산책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 작품을 쓸 때가 어쩌면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베토벤은 말한다

 

나도 한때는 삶이라는 직업을 꿈꾸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에겐 아직도 더 많은 커피, 더 많은 담배, 그리고 더 많은 몽상과 산책이 필요할 뿐!

 

5

 

한때는 아리따운 새악시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세상과 무관하게, 무책임하게 살고 싶었다

오롯이 산수유열매 같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 떨어지는 눈발처럼 가뭇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전생의 일이었던 것이다

 

6

 

폴리나 가가리나의 <뻐꾸기>를 듣는 밤이다, 원곡은 빅토르 최의 <꾸꾸슈까>이다

빅토르 최는 가수이면서 시인이었다 짐 모리슨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은 왜 모두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을까, 그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시는 종이에 녹음된 한 곡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다 쓰이지 않은 노래가 몇 개나 되는가?

 

7

 

눈의 이름을 물으며 첫눈의 언어를 찾아 말을 타고 떠났던 누군가의 시집이 조만간 나올 것이다

 

L’art du flocon de neige 라흐 뒤 푸르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

 

8

 

요즘 나의 생각은 이절에서 시작되어 이절로 끝난다 삶의 일절은 일절 생각하지 않는다

 

숲으로 가자 초승달 같은 강이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곳 밤이면 대낮보다 환한 달이 뜨고 초저녁 별들이 강변의 돌멩이들보다 더 크게 허공에 매달려 있는 곳

 

9

 

공간은 하나의 신이다

 

새로운 공간은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기 때문이다

 

10

 

쉬리, 버들치, 퉁가리, 열목어, 기르지 않아도 저 홀로 사는 것들

자작나무, 돌배나무, 산사나무, 산초나무, 생강나무, 목련, 라일락

 

하늘이 주는 빛, 눈, 물 받아먹고 스스로 생을 이룩하는 것들

 

11

 

이절의 앞강을 이강이라 부르고

이절의 뒷산을 여량이라 부른들 누가 뭐라 하랴

문곡의 옛 이름은 물곰

문곡의 앞강을 문강이라 부른들 그 또한 누가 뭐라고 하랴

물곰에는 내 어린 시절 죽마고우가 살고

지금은 소리꾼이 되어 정선 아라리를 부르지

이절 다래마을을 뜻하는 월천(月川)은 원래 달내였겠지

ㄹ과 ㄴ이 흘러가는 강물 소리를 내며 부딪치다 달래가 되고

달래의 받침 ㄹ이 오랜 세월 말을 타고 타박타박 소리를 내며 사라져

다래가 되었겠지

시인은 사물에 아름다운 이름을 부여하는 자

이제부터 이절의 앞강은 이강 이절의 뒷산은 여량

그대가 두고 온 세상은 그냥 거기에 남겨 두고

일절 말하지 말 것 여기는 이절이니

이절이 좋아 이절에 와서 우는 작은 새여

여량이 좋아 여량에 와서 부는 바람이여

여기는 위대한 모성의 대지

세상의 변방을 떠돌던 오랑캐들 하나둘씩 모여들어

스스로 한 편의 장엄한 시가 되는 곳

 

이절에서 여량까지

누군가 걸어가며 생을 노래한다

 

이절엔 이강

문곡엔 문강

여량엔 오랑캐

 

12

 

소금기를 빼고 살짝 데쳐 먹는다

열 종류가 넘는 채소를 키우고

월동 준비에는 감자와 무가 필수적

눈 쌓인 길을 걸어갈 때는 설피가 실용적

누군가의 편지가 읽고 싶어지는 겨울밤은 회상적

방풍 나물은 무쳐 먹거나 튀겨 먹으면 맛있지

두릅은 너무 쇠기 전에 채취해서 잘 챙겨둘 것

시골에는 하루에 세 번밖에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것

차는 있지만 가능하면 자전거를 이용할 것

자전거도 좋지만 가능하면 걸어 다닐 것

사람들과 어울리되 고독을 유지할 것

머위 된장에 밥을 먹을 때만 엄마 생각을 하는 불쌍한 인류

눈이 녹기 시작하면 감자를 심을 것

감자는 위대한 양식

감자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수십 가지

감자가 없었으면 따스한 겨울과 평화도 없었겠지

그대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생도 감자로부터 왔나니

꿈꾸는 자여 겨울을 나려면 감자를 준비하라

그런데 그 많은 감자를 쌓아두던 낡고 허름한

부엉이 곳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 감자! 창포물에 머리나 감자!

 

13

 

화절령의 봄

 

14

 

여름의 아우라지

 

15

 

만항재의 가을

 

16

 

눈 내리는 겨울의 사북

 

17

 

몰운대는 동쪽에 있고 가리왕산은 서쪽에 있지

 

남쪽은 가수리, 북쪽은 진부

 

여기는 이절, 세상의 끝

 

18

 

옛날에 서울에서 출발한 열차가 예미, 자미원을 지나 사북에 도착한 후 열차를 갈아타고 별어곡과 선평을 지나면 당도하던 곳 저녁 아홉시가 되면 누군가의 무거운 행상 보따리가 기차에 실려 도착하던 곳 세상에서 가장 환했던 정선역의 역사(驛舍)

 

19

 

실례할게요

 

20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어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3)

 

21

 

명태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백성의 향수도 맛본다4)

 

22

 

삼리 밖 강쟁변엔 자개들에서 비멀이한 옷을 부숭부숭 말려 입고 오는 길인데 산모통고지 하나 도는 동안에 옷은 또 함북 젖었다

한 이십리를 가면 거리라든데 한껏 남아 걸어도 거리는 뵈이지 않는다

나는 어니 외진 산길에서 만난 새악시가 곱기도 하든 것과 어니메 강물 속에 들여다뵈이든 쏘가리가 한자나 되게 크든 것을 생각하며 산비에 젖었다는 말렸다 하며 오는 길이다

이젠 배도 출출히 고팠는데 어서 그 옹기장사가 온다는 거리로 들어가면 무엇보다도 몬저 ‘주류판매업’이라고 써붙인 집으로 들어가자

그 뜨수한 구들에서 따끈한 삼십오도 소주나 한잔 마시고 그리고, 그 시래기에 소피를 넣고 두부를 두고 끓인 구수한 술국을 뜨근히 멫사발이고 왕사발로 멫사발이고 먹자5)

 

 23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어 걸고 국수에 치는 도야지 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백였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 고기를 물구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6)

 

24

 

이절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오랑캐의 계절은 무엇인가

 

누군가 다시 묻는다

 

이절은 일절과 삼절 사이에

사랑은 삼랑과 오랑 사이에

북태평양과 오슬로 사이에

바람 부는 숲과 강 사이에

 

나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어제는 내내 무척 아름다웠다

숲 속의 음악, 내 머리칼 사이와 너의 내민 두 손 속의 바람, 그리고 태양이 있었기 때문에

 

* (1)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2) 백석, <정주성> (3) 백석, <산숙> (4) 백석, <북관> (5) 백석, <구장로-서행시초1> (6) 백석, <북신-서행시초2>에서 인용하였다

 

월간 『현대문학』 2021년 8월호 발표

 


 

박정대 시인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그녀에서 영원까지』, 『불란서 고아의 지도』가 있다. 현재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