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희 시인 / 봄을 빚는 그대에게
책장을 걷다가 손가락을 베였어요 보일 듯 말 듯한 상처가 보이지 않게 아프더니 보이지 않게 또 당신이 아프네요 늘 마음이 먼저 가 안부를 묻고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돌아오지만 칼바람 부는 겨울 토방에서 홀로 봄을 빚고 있을 그대를 생각하며 오늘은 내 손가락이 네 손가락인 듯 연고를 바르고 대일밴드를 친친 감아요 내 작은 소망 있다면 너의 아픔에 대일밴드 하나 붙여주는 것,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걸 나는 알아요 눈물로 빚은 봄은 별빛보다 아득히 눈부시기에 아무도 훔쳐갈 수 없다는 그것이지요
홍수희 시인 / 5월
시들 때를 미리 슬퍼한다면 장미는 피지 않았을 거예요
질 때를 미리 슬퍼한다면 나무는 초록을 달지 않았을 거구요
이별을 미리 슬퍼했다면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았겠지요
사랑이란 이렇게, 때로는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
5월의 장미처럼 나는 그리운 이여 5월의 신록처럼 나는 그리운 이여
당신을 향해 다시 피어나겠어요 당신을 향해 다시 시작하겠어요
홍수희 시인 / 세상에, 봄이라니요
그해 겨울에도 봄은 오지 않을 줄 알았지요 마음 바깥에도 마음 안에도 쩡쩡 얼어있던 고드름, 겨울을 건너 겨울이 오고 그 겨울을 거듭 건너고 건너 창틀에 반짝이는 봄을 보지 못할 줄 알았지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빙판의 겨울을 수없이 건너 세상에 봄이라니요, 다시는 영영 끝끝내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봄이 부드럽고 하얀 깃털처럼 무거웠던 어깨에도 손등에도 몰래몰래 내려앉고 있었네요, 중요한 건 마음에 희망을 간직하는 일, 실오리만 한 희망이라도 끝끝내 놓지 않는 일, 봄이라니요 봄이라니요 혼잣말하는 당신, 눈 속에서 피어나는 복수초처럼 꽝꽝 얼어버린 얼음장 밑 숨을 죽이며 숨을 참으며 혹한의 겨울을 견디는 당신, 지금 울고 있는 당신, 울지 말아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정대 시인 / 아침부터 보스포루스 해협 횡단하기 외 1편 (0) | 2022.01.17 |
---|---|
강재남 시인 / 너무 많은 여름 외 1편 (0) | 2022.01.17 |
장이엽 시인 / 송화가루 한 무더기 날아간다 외 5편 (0) | 2022.01.17 |
하재봉 시인 / 세상을 뒤집을 것 같은 외 1편 (0) | 2022.01.17 |
한연희 시인 / 볼링을 칩시다 외 1편 (0) | 2022.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