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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이엽 시인 / 송화가루 한 무더기 날아간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7.

장이엽 시인 / 송화가루 한 무더기 날아간다

 

 

소나무에 꽃이 피었다

 

검은 고양이 그늘 찾아 숨어들고

감자밭 고랑 사이로 홀로 남겨진 주전자

햇살을 끌어모아 되쏘아대는

정오의 시간

  

퍽!

폭음이 울리더니

송화가루 한 무더기

바람을 잡아타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허공을 가르는 수만 겹 꽃가루의 비행

희뿌연 먼지 뿜어내며

가물가물 흩어진다

  

만개한 꽃송이의 일순간은

어찌 저리 짧은가!

  

베란다 난간에 걸쳐있던 노란 스웨터가

소매 걷어붙인 채

요동치는 봄날의 심사를

기록하고 있다

  

구구저꾸 구구저꾸

꽃밥 따먹으며

같은 말로 몇 번씩 고맙다고 인사하던 산비둘기도

내내 떠날 줄 모르고 맴돌고 있었다

 

 


 

 

장이엽 시인 / 모모의 소지품

 

 

그러니까 이 강아지에게는 이름이 없다. 애완용 강아지가 아니었으니까 부를 일이 없었다. 아니 인형이니까 이름이 없었다. 아니 거들떠볼 일이 없었다.

 

화장대 위, 오랫동안 쓸 일 없었던 빨강 매니큐어 뒤에 버려져 있던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은 작은 봉제인형. 이 녀석과 마주쳤다. 녀석의 눈을 들여다본다. 내려앉은 눈꺼풀 때문에 그럴까, 불거진 눈이 슬퍼 보인다. 가죽으로 덧댄 코에는 콧구멍이 없다. 냄새 맡을 일이 없으니까, 라고 이해했다. 귓바퀴가 고정돼 있다. 덮여있다. 귓구멍도 막혀있다. 그래, 들을 일이 없으니까, 그럼 누구도 이름 불러주지 않은 게 서럽지는 않았겠군. 어라, 입은. 가죽 코를 따라 내려온 인중도 있고 입도 있는데 바느질 선만 있을 뿐이다. 먹을 일이 없을 테니까, 하고 이해했다. 배를 주물러 보았다. 작은 알갱이들이 만져진다. 다글다글 소리가 난다. 언뜻 배고플 때 들리는 꼬르륵 소리 같기도 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 입이 없는데 어떻게 먹어, 먹는다 해도 배설할 수 있는 배설기관이 없으니, 구멍이라는 구멍은 모두 막혀 있으니 어떻게 순환하겠어. 인형에 불과하잖아. 만지작거렸다. 슬프다. 구멍이 없는 일이 이렇게 슬픈 거였구나.

 

만지작대다가 강아지 인형의 네 다리에 남아있는 실밥을 보았다. 어딘가에 붙어있었던, 매달려 있었던, 매달려 있었을 때는 매달린 그것이 이 강아지 인형의 입이고 코이고 귀이고 항문이었겠다, 는 생각이 문득. 그렇게 살아냈던 한 시절 있었겠다, 는 생각이 문득. 실밥을 잡아 뽑으며 이것이 이 녀석 탯줄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뜨거운 삶의 흔적 하나가 지금 내 손안에 있다는 생각이 문득.

 

 


 

 

장이엽 시인 / 생략법(省略略)

 

 

생략법(省略略)을 좋아하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쉽게 생략했고 생략된 것들에 대해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들의 대화는 생략에서 생략으로 이어졌다.

대부분 의견의 전반을 생략으로 표현하는데도

그들끼리의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생략에 익숙한 이들은 뭐든지 짧게 끝냈다.

그들은 언제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야 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생략이 서툰 이들은

난처함을 감추지 못한 채 쩔쩔매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리를 뜨기 전 이야기를 끝내려는 것인지

들어주는 이가 없을까 봐서인지

주위를 돌아보거나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숨 쉴 겨를 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말을 했다.

  

몇몇은 나에게도 생략법을 써서 접근해왔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단계를 말하는 이는 없었다.

실수로 빠트린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뺀 것인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간극에 숨어있는 생략들 사이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불명의 정체를 생략해야만 생략으로 이해될 수 있는 생략들 앞에 서.

소리 없는 소리로 말하고 발 없는 발로 뛰어다니다가

제멋대로 팽창하고 재구성된 생략법에 잠식당한 우리는,

아니 나는, 지금 위태롭다.

 

 


 

 

장이엽 시인 / 입술 옆에 생겨난 콩알만 한 물집 하나

 

 

입술 옆에 콩알만 한 물집이 생겼다.

깨알만 하던 것이 쌀알만큼 커졌다.

먹을 때 양치할 때 옷 입을 때

요리조리 피해 봐도 자꾸만 스치더니

벌겋게 독이 올라 기세가 등등하다.

며칠을 참고 견디다가 허세로 맞서본다.

비누칠도 벅벅 하고 쓱쓱 문질러 닦아주고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려 숟가락질도 해보는데

콩알만 하던 아픔이 쌀알만큼 작아지는 거다.

쌀알만 하던 아픔이 깨알만큼 작아지는 거다.

아픔이란 아픔들이 깨알처럼 작아지면서

콩알만큼 탱탱하게 부풀었던 물집이 터졌다.

터진 자리에 생긴 물컹한 딱지를 보고

입술 옆에 묻은 것을 닦아내라고

마주치는 사람들이 신호를 보내온다.

나는 딱지를 살살 어루만지며

웃음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콩알만 한 물집으로 돋아난 내 슬픔에 대하여

쌀알만 한 물집으로 웅크린 내 슬픔에 대하여

고개 끄덕이며 도란거리는 사이

입술 옆에 붙어 있던 콩알만 한 딱지 하나

단단히 굳어지더니 들썩들썩 일어나

슬며시 떨어져 나갔다.

 

 


 

 

장이엽 시인 / 등(等)

 

 

비주류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이름이다

  

열거된 각각의 명사 뒤에서 때로는 ‘들’로

때로는 ‘따위’로 바뀌어 불리기도 하는

확인할 필요가 없는 초대 손님

  

솜털로 채워진 낙타의 귓속에 관심이 있는 당신이라면

‘등’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바위 그늘에 주저앉아 종일토록

바람을 기다리는 노루귀가 되어 본 당신이라면

‘등’의 구별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여!

행여나 부피를 재려고 실린더 눈금을 읽게 될 때는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말고

밑에서 올려다보지도 말고

눈높이를 액체 표면과 수평이 되도록 맞추어야 한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당신 옆에서 간간이 물잔 비우는 나 등을 만나거든

혼자서 술을 따라 마시는 나 등을 만나거든

  

당신의 이름을 받쳐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기뻐해 주시라

당신의 얼굴을 밝혀주는 기타 등등을 만났다고 반가워해 주시라

 

 


 

 

장이엽 시인 / 법성포 덕자

 

 

법성포 굴비에 밀려서 긴 세월 지난하게 살았다는 법성포 덕자

어떤 이들은 덕자를 두고 병어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참말로, 갸 이름은 덕자랑게! 콕 찔러 주는 한 마디면 어깨가 으쓱해진다

  

때로는 서해안 염전에서 갓 올라온 단 소금에 몸을 담근 뒤

높은 장대에 매달려 바닷바람을 맞고 싶었고

식탁 한가운데 넓은 접시에 앉아 뽐내고 싶은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덕자라는 이름을 찾아 주는 그 마음에 덕자는 덕자인 것이 행복한 것이다

  

할머니의 할머니 그 위에 할머니 때부터 전해내려 온

쥐구멍에도 볕든다는 말,

덕자도 안다. 어느 굴곡진 그늘에나 해 뜰 날이 있다는 것을!

직선 아니면 굴절 아니면 반사 그것도 아니면 볕은 굴러서라도 들어왔기에

 

 


 

장이엽 시인

1968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09년 《애지》봄호 신인문학상에 모서리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2011~201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분야 차세대예술인력집중육성지원(AYAF) 대상자선정,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삐뚤어질 테다』(2013, 지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