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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연희 시인 / 볼링을 칩시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7.

한연희 시인 / 볼링을 칩시다

 

 

바닥으로 기우는 몸집을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일이 더는 벌어지지 않아요 나는 코끼리에게 갑니다 뭉툭한 손가락을 놀려요 우뚝 선 핀들을 향해 스트라이크 더블 스트라이크 그게 마지막 소임인 양 열심히 넘어지면서 스텝을 밟아요

 

던진 볼의 무게만큼 엉뚱함이 불어나요 여길 오기 전 무얼 했었는지 좀 전의 내가 콜라를 쏟아버렸는지 의미 없어요 전광판에는 무늬들이 깜빡입니다 과연 내가 몇 번이나 실패했을까요 발밑에서 코끼리의 아우라를 봅니다 내 그림자가 튀어나와 거침없이 앞으로 갑니다

 

밀림의 한복판에 선 기분, 이대로 너는 초록색 코끼리, 성난 코끼리, 그럼 나는? 레인 위에 올라 쿵쾅쿵쾅 장단을 맞춰요 유연한 귀를 잡아당겨요 움츠러든 코를 쭉 빼기 오늘을 반성하지 말기 그리고 나를 벌레쯤으로 여기는 무리에게 돌진

 

내 앞을 가로막는 핀들을 차례대로 쳐내고 또 쳐냅니다 늘어나는 편견의 울타리를 부숴요 질질 끌리는 신과 함께 갑니다 미끄러지는 동안 가시덩굴처럼 달라붙는 이들의 얼굴을 무시해요 단단해진 덩치를 앞세우고 끝까지 나아가요 초원의 냄새가 바싹 따라붙습니다

 

한연희,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아침달 , 2021, 69쪽

 

 


 

 

한연희 시인 / 온다의 결말

 

 

누구에게나 열린 자세로 임했기에

누구나 온다를 좋아했다

 

온다를 시시콜콜 부르고

밤낮으로 이용했다

 

온다와 함께 식당에 갔다

호텔에 갔다

 

온다는 왼쪽에서는

웃다가

기울이면 걷다가

침을 꾸욱 삼키면 운다였다

 

틈만 나면 온다는 기억을 잃었기에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온다에게 계단을 오르는 여주인공은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와 같았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온다는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마주했고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대사 없는 오늘은 마음에 들어 했다

 

온다는 열심히 살다를 연기했다

죽다가 목구멍에서 기어 나와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포커페이스 할 줄 알았다

 

마음의 분량이 미니시리즈로 늘어갔고

끝까지 결말을 예측할 수가 없어도

견딜 수 있었다

 

온다에게는

이 세계가

전원을 누르면 한꺼번에 암전이 되는 브라운관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한연희 외, 『모든시』가을호, 모든시, 2019, 108~109쪽

 

 


 

한연희 시인

1979년 경기 광명 출생. 2016년《창작과 비평》 신인문학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