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우식 시인 / 페테르부르크의 백야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6.

강우식 시인 / 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여름궁전 분수의 화려한 물줄기도 끊어졌다.

한 여자의 날카로운 비수에 찔려

이제는 삼류가 되어버린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가슴이 찢어져 피를 철철 흘리며 죽고 싶은

꿈에 잠긴 한 사내가 백야의 거리를 걷는다.

수많은 종교문답은 있었으나 무엇 하나 구원은 없고

죄 아닌 것이 죄가 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같이 이해할 수 없는 백야다.

먹장 신비 속의 별들도 다 사라진 페테르부르크의 백야다.

푸시킨은 바람난 아내 때문에 결투를 신청하고

격정의 생을 마감하였다. 어리석도다.

삶이 그대를 속였구나.

항구의 골목에는 결투를 신청할 필요도 없는

밤의 꽃들도 더러 눈에 띠나

나는 사랑할 수가 없다.

낮과 밤의 경계도 없는 미망인데

사랑에 무슨 만남과 이별인들 있겠는가.

러시아여, 러시아여, 러시아워처럼 분주한 러시아여!

나는 망명한 백계러시아의 여자처럼

눈 덮인 고향의 벌판을 못 잊어

이국의 어둡고 침침한 복도에 달린

백열등 알전구의 얇은 유리를 손톱으로 으깨며

뼈가 저리도록 흰 눈길을 걷듯

향수를 달래던 소리를 듣고 싶구나.

고향을 떠난 망국의 백성들은 그저 허무를 안고

눈동자가 없이 희부옇게 눈을 뜨는 밤이다.

혁명은 이 도시에 와 화려함을 맛본

톨스토이나 레닌에게서 싹텄다.

혁명 때문에 망한 사람도 있고

깃발처럼 펄럭이는 사람도 있다.

혁명은 낮인가 밤인가.

혁명은 곧장 선동을 앞세우지만 음모의 밤이다.

밀약과 같은 음모가 없이

어찌 선동 선전이 이루어지겠는가.

나는 이런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에미르타쥬 겨울궁전에 가서

역대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를 본다.

잘 다듬은 콧수염의 사내들과

한결같이 풍만한 가슴의 황비들을 본다.

그 속에는 남편을 죽이고 여제가 되어

스물두 명인가 세 명의 남자를 품에 안은

에까제리나 여제도 있다. 슬프지만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없는 나는

남자를 에까제리나보다 더 잘 아는 창녀의 품에 안기리라.

러시아여, 러시아여, 마야코프스키만이 혁명아이더냐.

백야의 밤일수록 오로라를 꿈꾸는 사람들은

오로라의 꿈에 젖은 창녀들처럼 혁명은

빵을 베개로 삼고 자더라도

페테르부르크 항구에서 꽃을 피우리라.

하지만 밤은 밤답게 오지 않았고

새벽은 밝지 않았다.

새벽은 알에서 깨어나듯 밝지 않았다.

죄 없이 돌아서는 사람 누가 있으랴.

써도 써도 남는 죄 같은 백야만이 있구나.

이해할 수 없는 백야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세워진

페테르부르크다. 봄이 와 꽃 피듯이

아름다움은 때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무자비한 노동의 착취에서부터 오고

혁명은 그 판을 뒤집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어김없이 찾아오는 백야와 같다.

미망의 깨우침이다. 깨우침의 미망이다.

늪지는 늪지대로 그냥 두는 것이 낫다.

 

저편 어디에는 아직도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는,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뜬눈의 괴로움이

오늘도 잠들지 못하는 정교회 예수와 같이 있도다.

 

계간 『POSITION』 2015년 겨울호 발표

 

 


 

강우식 시인

1941년 강원도 주문진에서 출생. 1966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별』,『사행시초』,『벽, 살아가는 슬픔』,『사행시초 2』 등 다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