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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수희 시인 / 봄을 빚는 그대에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7.

홍수희 시인 / 봄을 빚는 그대에게

 

 

책장을 걷다가

손가락을 베였어요

보일 듯 말 듯한 상처가

보이지 않게 아프더니

보이지 않게 또 당신이

아프네요

늘 마음이 먼저 가

안부를 묻고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돌아오지만

칼바람 부는 겨울 토방에서

홀로 봄을 빚고 있을

그대를 생각하며

오늘은

내 손가락이 네 손가락인 듯

연고를 바르고

대일밴드를 친친 감아요

내 작은 소망 있다면

너의 아픔에 대일밴드 하나

붙여주는 것,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걸

나는 알아요

눈물로 빚은 봄은

별빛보다 아득히 눈부시기에

아무도 훔쳐갈 수 없다는

그것이지요

 

 


 

 

홍수희 시인 / 5월

 

 

시들 때를 미리 슬퍼한다면

장미는 피지 않았을 거예요

 

질 때를 미리 슬퍼한다면

나무는 초록을 달지 않았을 거구요

 

이별을 미리 슬퍼했다면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았겠지요

 

사랑이란 이렇게,

때로는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

 

5월의 장미처럼 나는 그리운 이여

5월의 신록처럼 나는 그리운 이여

 

당신을 향해 다시 피어나겠어요

당신을 향해 다시 시작하겠어요

 

 


 

 

홍수희 시인 / 세상에, 봄이라니요

 

 

그해 겨울에도 봄은

오지 않을 줄 알았지요

마음 바깥에도 마음 안에도

쩡쩡 얼어있던 고드름,

겨울을 건너 겨울이 오고

그 겨울을 거듭 건너고 건너

창틀에 반짝이는 봄을

보지 못할 줄 알았지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빙판의 겨울을 수없이 건너

세상에 봄이라니요,

다시는 영영 끝끝내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봄이

부드럽고 하얀 깃털처럼

무거웠던 어깨에도 손등에도

몰래몰래 내려앉고 있었네요,

중요한 건 마음에

희망을 간직하는 일,

실오리만 한 희망이라도

끝끝내 놓지 않는 일,

봄이라니요 봄이라니요

혼잣말하는 당신,

눈 속에서 피어나는 복수초처럼

꽝꽝 얼어버린 얼음장 밑

숨을 죽이며 숨을 참으며

혹한의 겨울을 견디는 당신,

지금 울고 있는 당신,

울지 말아요

 

 


 

홍수희 시인

1995년 문예지 <한국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 이육사문학상 본상, 부산가톨릭문학상 본상을 수상. 부산가톨릭 문인협회, 부산 문인협회, 부산 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시집으로 [달력 속의 노을](1997,  도서출판 빛남)과 [아직 슬픈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2003, 도서출판 띠앗), [이 그리움을 그대에게 보낸다](2007, 도서출판 한솜), [생일을 맞은 그대에게](2019, 도서출판 해드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