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 시인 / 너무 많은 여름
좀 더 행복하거나 덜 불행한 삶으로 가요 좋은 여름과 여름이 키우는 대로 크는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요 어정쩡한 날씨는 버려두고요
비는 죄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대요 누군가 말한 것 같은데 생각을 굴려도 굴러가기만 하네요 빗물 고인 자리에 여름이 우거져요
여름이 슬퍼요 생각을 버리기로 해요 딴청 부리기로 해요 나는 걷고 있어요
발자국 있는 곳마다 대추야자나무를 심어요 대추야자나무 열매를 거꾸로 키워요 배경으로 걸어두기 좋은 구도로요
여름의 직관을 믿어보기로 합니다 말라가는 여름은 생략하면 그만이고요
스물여섯은 견디기 힘든 숫자였어요 그래서 발자국은 말을 잘 듣질 않았나 봅니다 대추야자나무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표정 난해하고 불가해한 얼굴이 대책 없이 흩어져요
여름이 내게 준 건 깊은 잠과 자장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폭우와 빗줄기와 악수하는 사람 빗줄기를 타고 환상동화가 된 스물여섯의 사람
여름을 거두어요 죽은 여름과 죽어갈 여름, 여름 귀퉁이를 오려 모으는 게 취향이라거나 아니라거나 아무 상관없이요 그냥 다 거두어가요
반년간지 『상상인』 2021년 하반기호 발표
강재남 시인 / 단지 암묵적으로
침묵은 길고 단단했습니다 아침을 읽어내기엔 여명이 터지지 않았고 일찍 당기기엔 비가 오고 있었지요 어둠에 익숙해지려 자세를 바꾸었습니다 동그랗게 물꽃을 피우며 빗방울이 흩어졌습니다 비의 휴식처를 가늠해 보았습니다 제 몸 누인 곳에 제 색을 입히는 빗방울 꽃잎으로 떨어진 비가 꽃잎 문양이 되는 걸 무심히 흘리고 있었습니다 키가 훌쩍 자란 여름이 색을 덧입었습니다 놓친 걸 놓친 줄 모르는 나는 완결되지 못한 비의 서사를 기록하고 있었고요 헤아려도 헤아려지지 않은 일들은 멀리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겠더군요 어둠에 익숙한 눈동자가 어둠으로 빨려들고 있었지요 저곳이 내 무덤일까요 여름의 중심을 관통하는 빗방울들이 수직으로 꺾였습니다 언제나 사랑해, 패랭이가 피었어 말하던 사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언제나 사랑해, 목소리만 남아서 패랭이꽃을 피웠습니다 여명을 끌어당겼습니다 아침을 읽어내는 책사가 돼보기로 마음먹은 날이었습니다 완결된 서사를 바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한생을 품기엔 내가 한없이 낮고 초라해서였습니다 그런 나를 안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온전한 내 편인 나를 생각해 보기로 하는 겁니다
계간 『다층』 2020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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