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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향란 시인 / 수자 언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7.

최향란 시인 / 수자 언니

 

 

울 엄마 살았을 적 언니 하나 낳아달라고 졸랐더랬지.

이미 남동생 있었으니 필요한 건 언니였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당가 석류꽃처럼 울 엄마 웃었지.

꽃무늬 치맛자락 붙잡고 안 돼? 엄마, 안 돼?

철없이 묻고 또 묻다가 잠들다 깨고 칭얼대다 깨곤 했지.

 

다 잊었다 했는데, 해지니네 국수집에서 심장 두근거리네.

죽은 울 엄마 붙들고 다시 국수 한 그릇 척하니 말아주는

언니 낳아 달라 떼쓰고 싶네.

남은 생 뜨거운 국수로 가슴 녹이며 살고 싶은,

욕심이 사발 속 김 서리듯 눈가에 술술 서리고 있네.

 

문 앞에서 양 팔 떡하니 벌려 가로막고

해지니네는 울 언니 국수가게라고 말하고 싶은,

염치없는 희망 한 번 꿈꾸고 싶네.

해지니네 국수집, 가을 국화꽃으로 핀 수자 언니가 따뜻한

국수를 척척 말고 있네.

 

 


 

 

최향란 시인 / 태기네 고추밭

 

 

빈 고추밭에서 고추 따는 흉내를 낸다. 지독한 가뭄을 겪고

모종값 겨우 거둔 태기가 그래도 땡글땡글 여물다고 새까맣

게 웃는다. 저 녀석 모자라는 놈도 아닌데 귀농 삼년 째 제자

리 농사짓고 있다.

 

책에서 시킨 대로 했는디 영 수확이 그렇소. 고추밭에 고추

나무가 반 잡풀이 반 유기농은 원래 이리 하는 건디요, 우리

가 묵은 것보다 벌레가 더 많이 묵어 뿌렇소. 아무나 많이 묵

었으면 됐지 뭐, 안 그렇소? 근디 올해도 누이한테는 아무것

도 못 주것소, 어짜까?

 

혼자서 잘도 씨부렁대는, 태기네 빈 고추밭.

 

 


 

 

최향란 시인 / 슬픈 재산

 

 

하필 그 사람 꽃피는 봄날에 누웠을까,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가난한 그가 남기고 간 슬픈 재산에 대해 묻는다,

빈 소주잔 꽉 움켜쥐던 나이보다 늙은 그의 손등

죽음이 이토록 쉬운 것이었을까, 하염없이 꽃들이 피고

그렇게 가난했던 그 사람은

슬픔이 모두에게 공동분배 되는 곳에 서 있는가.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신다.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지만 스스로 등져야만 했냐고,

쉰 목소리로 묻는 술잔들이 탁, 탁, 탁,

얼마나 더 부딪쳐야

가파른 곳에 피는 꽃도 꽃답게 생을 마칠 수 있을까.

창 밖 아직 환하여 아무도 생 마친 봄꽃 하나 보지 못하고,

그것도 운명이라면 마지막 술 한 잔 하고

꽃답게 가시게.

차마 웃지 못하는 낮에 나온 하현달.

 

 


 

최향란 시인

전남 여수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으로 『밖엔 비, 안엔 달』(리토피아, 2013)이 있음. 여수 해양문학상 시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