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향란 시인 / 수자 언니
울 엄마 살았을 적 언니 하나 낳아달라고 졸랐더랬지. 이미 남동생 있었으니 필요한 건 언니였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당가 석류꽃처럼 울 엄마 웃었지. 꽃무늬 치맛자락 붙잡고 안 돼? 엄마, 안 돼? 철없이 묻고 또 묻다가 잠들다 깨고 칭얼대다 깨곤 했지.
다 잊었다 했는데, 해지니네 국수집에서 심장 두근거리네. 죽은 울 엄마 붙들고 다시 국수 한 그릇 척하니 말아주는 언니 낳아 달라 떼쓰고 싶네. 남은 생 뜨거운 국수로 가슴 녹이며 살고 싶은, 욕심이 사발 속 김 서리듯 눈가에 술술 서리고 있네.
문 앞에서 양 팔 떡하니 벌려 가로막고 해지니네는 울 언니 국수가게라고 말하고 싶은, 염치없는 희망 한 번 꿈꾸고 싶네. 해지니네 국수집, 가을 국화꽃으로 핀 수자 언니가 따뜻한 국수를 척척 말고 있네.
최향란 시인 / 태기네 고추밭
빈 고추밭에서 고추 따는 흉내를 낸다. 지독한 가뭄을 겪고 모종값 겨우 거둔 태기가 그래도 땡글땡글 여물다고 새까맣 게 웃는다. 저 녀석 모자라는 놈도 아닌데 귀농 삼년 째 제자 리 농사짓고 있다.
책에서 시킨 대로 했는디 영 수확이 그렇소. 고추밭에 고추 나무가 반 잡풀이 반 유기농은 원래 이리 하는 건디요, 우리 가 묵은 것보다 벌레가 더 많이 묵어 뿌렇소. 아무나 많이 묵 었으면 됐지 뭐, 안 그렇소? 근디 올해도 누이한테는 아무것 도 못 주것소, 어짜까?
혼자서 잘도 씨부렁대는, 태기네 빈 고추밭.
최향란 시인 / 슬픈 재산
하필 그 사람 꽃피는 봄날에 누웠을까,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가난한 그가 남기고 간 슬픈 재산에 대해 묻는다, 빈 소주잔 꽉 움켜쥐던 나이보다 늙은 그의 손등 죽음이 이토록 쉬운 것이었을까, 하염없이 꽃들이 피고 그렇게 가난했던 그 사람은 슬픔이 모두에게 공동분배 되는 곳에 서 있는가.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신다.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지만 스스로 등져야만 했냐고, 쉰 목소리로 묻는 술잔들이 탁, 탁, 탁, 얼마나 더 부딪쳐야 가파른 곳에 피는 꽃도 꽃답게 생을 마칠 수 있을까. 창 밖 아직 환하여 아무도 생 마친 봄꽃 하나 보지 못하고, 그것도 운명이라면 마지막 술 한 잔 하고 꽃답게 가시게. 차마 웃지 못하는 낮에 나온 하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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