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미정 시인 / 도레미 파
화분에 파를 심으면 평범해질 줄 알았다
화분에 파를 심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아 화분에 심은 파에 물 주는 걸 거르고 화분에 심은 파가 시드는 걸 바라보며 화분에 심은 파를 그냥 지나치며
마트에 가서 대파를 사고 시장에 가서 다듬어 놓은 쪽파를 사며 오히려 평범해지기 시작했다
화분에 파를 심으면 평범해진다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중간쯤이 된다 평범에도 논리가 필요하다면
지나치던 순간에 평범해졌다 외면하던 순간에 평범해졌다
화분조차 잊어버리고 어쩌다, 아주 가끔 나는
성미정 시인 /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 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아직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 당신도 언젠가 저의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성미정 시인 / 김혜수의 행복을 비는 타자의 새벽
잠에서 깨버린 새벽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생뚱맞게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건 인터넷 메인 뉴스를 도배한 김혜수와 유해진의 열애설 때문만은 아닌 거지
김혜수와 나 사이의 공통분모라곤 김혜수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신혼 초 살던 강남 언덕배기 모 아파트의 주민들이었다는 것 같은 사십대라는 것 그리고 누구누구처럼 이대 나온 여자 가 아니라는 것 정도지만
김혜수도 오늘 밤은 유해진과 기자회견 사이에서 고뇌하며 나처럼 새벽녘까지 뒤척이는 존재인 거지 그래도 이 새벽에 내가 주제 높게 나보다 몇 배는 예쁘고 돈도 많은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속내를 굳이 밝히자면
잠 못 이루는 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오늘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도 남아도는데 몽롱한 머리로 아무리 풀어봐도 뾰족한 답이 없는 우리 집 재정 상태를 고민하느라 밤을 새느니 타자의 행복이라도 빌어주는 편이 맘 편하게 다시 잠드는 방법이란 걸 그래야 가난한 식구들 아침상이라도 차려줄 수 있다는 걸 햇수 묵어 유해진 타짜인 내가 감 잡은 거지
오늘 새벽은 김혜수지만 내일은 김혜자 내일모레는 김혜순이 될 수도 있는 이 쟁쟁한 타자들은 알량한 패만 들고 있는 나와는 외사돈의 팔촌도 아니지만 그들의 행복이 촌수만큼이나 아득한 길을 돌고 돌아 어느 세월에 내게도 연결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사실 나는 이 꼭두새벽에 생판 모르는 타자의 행복을 응원하는 속없는 푼수 행세를 하며 정화수 떠놓고 새벽기도 하는 심정으로 나의 숙면과 세 식구의 행복을 간절히 빌고 비는 사십 년 묵은 노력한 타짜인 거지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황금찬 시인 / 사랑안에 외 6편 (0) | 2022.02.07 |
|---|---|
| 손해일 시인 / 겨울 선인장 외 1편 (0) | 2022.02.07 |
| 선정주 시인 / 중랑천 하루 외 1편 (0) | 2022.02.07 |
| 서영호 시인 / 아름다운 여자, 남자 외 1편 (0) | 2022.02.07 |
| 도종환 시인 / 사격명령 외 2편 (0) | 2022.02.0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