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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금찬 시인 / 사랑안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7.

황금찬 시인 / 사랑안에

 

 

사랑안에

시간도 흐르지 않고

호수처럼 머물러 있다

 

장미밭에서

꽃 한송이를 찾았네

수목의 바다에서

찬란한 교목 한그루를

눈 여겨 보았네

 

하루의 태양이

금빛 날개로 쏟아져 내리는 날

하늘의 증인 앞에서

황홀한 사랑의 성문을 열고

출발의 깃폭을

나부끼게 하였네

사랑은 시작이 있을뿐

끝은 없느니

오색의 영롱한 내일을 바라보며

꽃잎으로 꽃잎으로

천년 신뢰의 기념탑을 세우라

 

구름으로 풀어 올린

신기한 기단

목과 목에 두르면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들의 바다이다

 

조용한 물결로

파도치게 하자

그림속에서 그린 집으로 문을 열고

그 집의 사랑의 주인이 되었네

모든 증인 앞에서

우리들도 손을 올려

행복의 길을 열고 있다

 

 


 

 

황금찬 시인 / 환상의 편지

 

 

구름은

편지를 읽고 있다

 

나는 나비부인의 영창

어떤 개인 날이나

쟈니스 키키의

오, 사랑하는 아버지를

듣듯이

환상의 편지를 듣는다

 

새벽 바다의 기침소리

환상의 편지

꽃잎에 모이는

맑은 이슬

소리 없이 별이지고

 

병든 나뭇잎이

흔들린다

 

마로니에 밤거리

바람소리

잠들어 있는

환상의 편지

 

어디에서 왔는가

구름이 읽고 있는

환상의 편지는

 

이 저녁엔

그가 읽고 있다

긴 고백

 

눈 뜨지 않는

환상의

편지.

 

 


 

 

황금찬 시인 / 그대의 모습

 

 

지워본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다.

그대의 모습.

 

하루의 일과로

몇 번이나 몇 번이고

지워보나

다시 살아나는

그대의 모습.

 

연필로 그렸다면

쉽게 지울 수도 있으리.

 

피로 그린

그대의 모습.

 

풀잎 5장을 따

그 풀잎들의 피로 그린

사랑의 그림자.

 

그대의

모습은

내 눈 속에 그려져 있다.

가슴 속에 그려져 있다.

지워지지 않는다.

 

 


 

 

황금찬 시인 / 바위와 나비

 

 

바위에 나비가 앉는다.

나비는 얼마동안

바위에서 꿈을 꾸다가

날아가버렸다.

 

바위에는 나비의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구름이 호수에 잠겼다 가도

체온을 남기지 않는다.

 

내가 살던 자리엔

무엇이 남을까.

한마디의 말이

그것은 풀벌레의

울음 같은 것이리.

 

모두 빈 의자일 뿐이다.

싸늘히 식어가는

메아리, 메아리.

그래도 얼마간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은

사랑했던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바다 위에 뱃길이

남아 있지 않는다.

 

 


 

 

황금찬 시인 / 돌아오지 않는 마음

 

 

이웃이

봄볕 같기

마음의 담을 헐었다.

 

꽃잎을 실에 매어

지연같이 날렸더니

구름 위에 솟은

마을 성머리에 걸려

돌이 되고 말았다.

 

십 년

다시 백 년에

돌아오지 못하는

꽃잎의 전설.

 

문을 열어놓고

한나절

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

빈 뜰

 

돌아오지 않는

마음자리에

미움의 나무에

열매가 연다.

 

 


 

 

황금찬 시인 / 가을연인

 

 

가을 벌레가 울고 있는가

내 사랑했던 여름의 연인은

서울 종로 마로니에 공원

식어가는 거리 위에

짙은 웃음소리만 남겨놓고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86년의 여름도

지줄대던 빗소리도

내 연인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여름 연인의 빈 커피잔

교차로 위에 계절의 꽃잎지듯

싸늘한 우리들의 대화가

담기고 있다.

 

 


 

 

황금찬 시인 / 빗소리

 

 

후박나무 잎에

내리는 빗소리는

이제 말 배우는

아기가

처음 내는 '엄마' 소리 같이

들리고 있다.

 

오동잎에 내리는

빗소리는

신을 벗고 걸어오는

네 발소리

 

소리는

모든 소리는

귀로 오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황금찬 시인(黃錦燦 1918년-2017년)

1918년 강원 속초시 출생. 1947년 <새사람>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였고 1951년 시 동인 '청포도'를 결성했다. 1953년 <문예>지에 <경주를 지나며>가 추천되어 정식으로 등단. 1965년 첫 시집 <현장>을 낸 이후 2008년 <고향의 소나무>까지 거의 매년 시집을 낼 정도로 왕성한 창작을 해왔다. 1948~78년에 강릉농업고등학교,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고, 1978~80년 중앙신학대학 기독교문학과 교수, 1980년~94년에는 추계예술대학, 숭의여자전문대학,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의했다. 1996 대한민국문학부문문화예술상. 1992 문화의 달 보관문화훈장. 1990 서울시 문화상. 1982 한국기독교 문학상. 1973 월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