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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미정 시인 / 움푹 패인 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4.

강미정 시인 / 움푹 패인 길

 

 

성난 빗물이 지나간 곳이,

알 수 없는 환부를 지닌 채

흘러가지 못하고 머뭇거린 곳이,

길이 되기도 한다

웅덩이에 빠진 바퀴를 빼려고

몇 번이나 부르릉거리며 바퀴를 돌려도

헛돌며 웅덩이는 더 깊이 패이는 것처럼

가슴 그 어디쯤에도

길이 패이고 웅덩이가 깊어지는 곳이 있다

이 깊게 패인 곳에 머무는

머뭇거린 마음이 길이 되기도 한다

성난 빗물만 살고 있다는

그대의 가슴에 닿고 싶어서

아픈 내 눈은 그대에게로 넘쳐흘러 갔지만

한번도 그대의 가슴 쪽에 이르지 못해

내 가슴 오래 아팠던 것처럼

오래 앓아 누웠던 시간이 길이 되기도 한다

서로가 알 수 없는 환부를 지닌 채

잠든 마음의 이마를 짚어보며

희고 찬 물수건을 얹어 주고 가는

느리고 따뜻한 손길이

서로에게 고요한 길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가슴 한 쪽이 몹시 쓰리다거나

그립다거나 하는 말들이 무수히 생겨나

사랑한다 말하는 그대가

움푹움푹, 패인 길이 되기도 한다

 

 


 

 

강미정 시인 / 떨림

-그대에게

 

 

젖은 수건 속에 오이씨를 넣고

따뜻한 아랫목에 두었죠  

촉 나셨는지 보아라,

싸여진 수건을 조심조심 펼치면

볼록하게 부푼 오이씨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반쯤만 열고 있었죠

촉 나시려고 파르르 몸 떠는 것 같아서

촉 보려는 내 마음은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조심조심 수건을 펼쳤던

저의 손은 또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촉 나셨는지 보아라,

아부지 촉 아직 안 나왔슴더,

빛이 들지 않게 얼른 덮어 둬라,

빛을 담기 위해선 어둠도 담아야 한다는 것을

한참 뒤 나중에야 알았지만요

그때는 빨리 촉 나시지 않는 일이

자꾸만 펼쳐보았던 때문인 것 같아서

오래 들여다보았던 때문인 것 같아서

촉 날 때까지 걱정스레 내 마음을 떨었죠

 

 


 

강미정 시인

경남 김해에서 출생. 1994년 《시문학》에 〈어머님의 품〉외 4편으로 우수작품상 등단. 시집으로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상처가 스민다는 것 』, 『타오르는 생 』 등이 있음. 현재 <빈터> 동인, (사)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