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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영 시인 / 즐거운 한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2. 15.

고영 시인 / 즐거운 한때

 

 

창을 두드리는 장대비가

방안 구석구석 빗소리를 남기고 갑니다

몸만 풀고 가기엔 아무래도 섭섭했던 모양이군요

책 속에도 빗소리로 가득합니다

저 떡갈나무 장대비가 숲을 건너가기 전에

나는 빗소리를 담아 두려 했습니다

빗방울을 움켜쥐고 있는 도토리들

도토리를 쏘아 올리는 흥겨운 떡갈나무들

숲속에 펼쳐진 저 춤사위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발끝이 들려, 마음이 들려

어느새 신명난 구경꾼이 되고 맙니다

징소리가 된 빗소리

꽹과리가 된 떡갈나무 숲 속

옹이투성이 나무의 잎도 빗소리에 긁히니

한가락 노래가 되는군요

한바탕 잔치가 질퍽한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밤은

빗소리를 떠나보내긴 글렀나 봅니다

어린 나무들까지 저렇듯 모여앉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으니

 

 


 

 

고영 시인 / 남해 가는 버스

 

 

보따리를 든 아낙들이 버스에 올라

아침햇볕에 졸고 있는 빈 좌석 앞에서

잠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다

바닷가 장터에 종일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면

뭐니뭐니해도 몸 간수가 제일이지

몸뚱어리가 재산인 시골 아낙들에게

저 정도 다툼은 차라리 아름다운 율동이다

한 개의 좌석에 두 명이 앉는 걸로

붙여야 할 흥정은 아쉽게 끝이 났다

바닥에 머릿수건을 깔고 앉아

집오리마냥 머리를 조아리는 아낙도 있다

밤새 단을 묶어 싼 노지시금치,

부추, 얼갈이, 봄동, 무말랭이, 오리알......

저 큰 보따리를 끌고 장을 보기 위해

찬물에 밥 말아먹고 새벽길을 나섰으리라

보따리 궁둥이가 시골 아낙들을 닮았다

승객과 보따리로 만선을 이룬 버스가

바다 건너 남해를 향해 가고 있다

 

 


 

고영 시인

1966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부산에서 성장. 2003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천년의시작, 2005)와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문학세계사, 2009)가 있음. 제1회 <질마재해오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