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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시인 / 즐거운 한때
창을 두드리는 장대비가 방안 구석구석 빗소리를 남기고 갑니다 몸만 풀고 가기엔 아무래도 섭섭했던 모양이군요 책 속에도 빗소리로 가득합니다 저 떡갈나무 장대비가 숲을 건너가기 전에 나는 빗소리를 담아 두려 했습니다 빗방울을 움켜쥐고 있는 도토리들 도토리를 쏘아 올리는 흥겨운 떡갈나무들 숲속에 펼쳐진 저 춤사위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발끝이 들려, 마음이 들려 어느새 신명난 구경꾼이 되고 맙니다 징소리가 된 빗소리 꽹과리가 된 떡갈나무 숲 속 옹이투성이 나무의 잎도 빗소리에 긁히니 한가락 노래가 되는군요 한바탕 잔치가 질퍽한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밤은 빗소리를 떠나보내긴 글렀나 봅니다 어린 나무들까지 저렇듯 모여앉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으니
고영 시인 / 남해 가는 버스
보따리를 든 아낙들이 버스에 올라 아침햇볕에 졸고 있는 빈 좌석 앞에서 잠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다 바닷가 장터에 종일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면 뭐니뭐니해도 몸 간수가 제일이지 몸뚱어리가 재산인 시골 아낙들에게 저 정도 다툼은 차라리 아름다운 율동이다 한 개의 좌석에 두 명이 앉는 걸로 붙여야 할 흥정은 아쉽게 끝이 났다 바닥에 머릿수건을 깔고 앉아 집오리마냥 머리를 조아리는 아낙도 있다 밤새 단을 묶어 싼 노지시금치, 부추, 얼갈이, 봄동, 무말랭이, 오리알...... 저 큰 보따리를 끌고 장을 보기 위해 찬물에 밥 말아먹고 새벽길을 나섰으리라 보따리 궁둥이가 시골 아낙들을 닮았다 승객과 보따리로 만선을 이룬 버스가 바다 건너 남해를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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